FT "달러확보 효자인 밀 등 곡물 수출, 러시아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 지렛대 역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막 러시아 대통령이 된 때였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식량 50%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모임에서 들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시장컨설턴트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전한 말이다. 2000년 해당 모임에 참석한 이 컨설턴트는 "푸틴은 이후 식량안보 증진을 목표로 삼았다"며 "그는 타국에 의존하는 걸 두려워했다. 이제 러시아는 밀 수출 1위국가다.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산 밀을 수입한다"고 말했다.

FT에 따르면 곡물 순수입국이었던 소련에 이어 러시아도 2000년까진 농업부문을 경시했다. 농업에 대한 보조금이 없었고 수입물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푸틴 대통령은 2004년 농업개발을 위한 국가주도 프로젝트를 본격 주도했다. 투자 활성화를 통해 농업생산량을 늘리는 게 목표였다. 곡물을 포함한 핵심 식량의 자급률을 80~95%로 설정했다.

10년 뒤인 2014년엔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곡물용선 계약제를 도입했다. 가즈프롬방크 애널리스트 다리아 스니트코는 "대형 기업들과 러시아 정부는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암거래시장을 양지로 끌어내기로 합의했다. 그 효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수출을 크게 증진시켰다"고 말했다.

루블화 가치 하락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산 수출품이 경쟁우위를 가지게 됐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이웃나라 우크라이나와의 갈등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 러시아 경제제재가 따랐다. 러시아는 서구로부터의 곡물수입 대부분을 중단하며 대항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 국내 농업계에 큰 도움이 됐다.

2017년 러시아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제치고 전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 됐다. 푸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세계 최고다. 우리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쳤다"고 자랑했다.

전세계 최대 밀 수출국 등극

경제제재로 큰 타격을 받던 러시아는 밀을 주축으로 한 곡물을 외자획득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다. 농업수출 강국을 꿈꾸는 러시아는 점진적으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중남미 전반으로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반면 미래가 불확실한 석유의 경우 의존도를 줄이려고 노력중이다. 일각에선 러시아 곡물이 크렘린의 새로운 석유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곡물도 러시아 외교의 새로운 지렛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16년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연합해 석유생산량을 감축했다. 사실상 OPEC의 수장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강력한 요구를 들어줬다. 투자리서치 제공업체인 'TS롬바르드'의 애널리스트 마디나 흐루스탈레바는 "사우디는 재정 확충을 위해 고유가 상황이 절실했다"고 말했다. 사우디보다 느긋했던 러시아는 협력하는 대가로 더 값진 보상을 얻어냈다. 그는 "러시아는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사우디에 '닭고기와 곡물 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해 관철했다"고 말했다.

열차곡물운송 분석업체인 '루스애그로트랜스'에 따르면 사우디는 최근 수입 밀의 품질 조건을 완화하며 러시아 곡물에 대한 문호를 더 확대했다. 현재 사우디 곡물 전체 수입량의 10%가 러시아산 보리나 밀이다.

러시아는 새로운 아시아 시장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러시아의 주요 고객이 됐다. 2020년 러시아의 쇠고기 수출량과 수출액은 전년 대비 3배, 돼지고기 수출은 2배 늘었다. 수출 쇠고기의 절반은 중국행이었다. 중국은 지난해 러시아 축산농가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베트남은 2019년 말부터 러시아산 돼지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육류를 수입하는 전세계 국가 중 2번째로 많은 양을 사들인다.

업계 전문가들은 곡물과 육류 수출로 개발도상국에 대한 러시아의 존재감이 커졌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러시아와 이웃하거나 가까운 국가들이 러시아산 농축산물을 선호한다.

UN에 따르면 2050년 전세계 인구는 현재보다 20억명이 늘어난다.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선 현재보다 40% 이상 식량생산이 늘어나야 한다. 러시아의 존재감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루스애그로트랜스 이사인 올레그 로가체프는 "러시아는 식량생산과 관련해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지정학적 입지 덕분에 지속 성장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의 고객 대부분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 대부분 러시아 남쪽에 위치한 나라들이다.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태평양 국가들, 극동 국가들은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그들이 식량 수요를 만족시키는 가장 빠른, 가장 쉬운 길은 러시아산 농축산물을 수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석유와 무기를 넘어

이는 한마디로 상전벽해다. 러시아는 전세계 수요 10%를 만족시킬 수준의 원유를 생산한다. 1990년대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는 오일머니로 식량 대부분을 수입했다. 하지만 이제 곡물에서 치즈까지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고 있다. 미국농무부 통계에 기초한 루스애그로트랜스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는 중동과 아프리카 밀 수입의 1/3, 아시아의 밀 수입 10%, 전세계 총 밀 수요의 약 1/5을 차지한다.

러시아 농업 생산량은 1991년 이후 약 50% 늘었다. 수출은 같은 기간 3배 늘어 지난해에 300억달러에 달했다. 2019년 대비 20% 늘었다. 외화획득의 주요 원천은 곡물이다. 이집트와 터키는 단일 국가로는 가장 많은 양의 러시아 농산품을 수입한다.

러시아 농업장관 드미트리 파트루셰프는 2024년까지 농업수출액을 50%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2025년까지 곡물생산량을 1억4000만톤으로 늘릴 방침이다. 수출시장 확대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다.

러시아는 현재 일시적 곡물 수출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노동력 부족과 농작물을 강타한 기후 악화 때문이다. 올해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적은 1억2700만톤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2025년 1억4000만톤 목표치가 상당히 힘겹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식량은 러시아가 이웃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외교적 도구가 됐다. 러시아는 터키에 대한 농산품 수출을 일부 중단했다. 2015년 러시아 전투기가 터키군에 격추된 이후 조치였다. 수출은 2년 뒤 재개됐다. 러시아 가스를 유럽으로 운송하기 위해선 경유지가 필요한데, 불가리아는 이를 거부한 반면 터키는 자국 영토를 관통할 수 있도록 하면서다. 터키는 2019년 러시아 밀의 최대 수입국이 됐다.

미국이 2018년 말 대 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하기 전, 러시아는 이란산 원유를 자국 농산물과 물물거래한 뒤 이 석유를 다른 나라에 판매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외교적 지렛대로

전문가들은 "이같은 일회성 이벤트 이후 러시아 농업의 규모가 커지고 러시아 정부가 농업강대국의 야심을 갖게 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는 서구와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중국으로 크게 기울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양국을 잇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개통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중국을 거대한 식량 시장으로 보고 있다. 인구 규모와 지리적 인접성, 그리고 동부 철도를 비롯한 인프라 확충 등이 중국의 강점이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의 중국시장 점유율은 상대적으로 적다. 중국의 곡물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가즈프롬방크 스니트코는 "우리는 언제나 중국에 의존한다. 중국은 주요 이웃이고 농업을 포함한 전반적인 교역국이다. 중국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고픈 가장 흥미로운 시장이다. 주요 농업 생산국들 모두가 중국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중 호주와 우크라이나가 무서운 경쟁국들"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밀 시장에서 선두를 차지한 러시아는 미래시장 확보 수단과 외교적 지렛대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TS롬바르드의 흐루스탈레바는 "현재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한다"며 "현재의 경제적 상황에서 러시아에게 중요한 건 밀을 지렛대로 국제외교정책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보다는 수출시장을 확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업계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곡물 수출이 석유생산량 하락에서 오는 손실의 일부를 상쇄하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 공식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 비중은 4%에 불과하다. 반면 석유와 가스는 15%에 달한다.

석유와 가스 매출은 국가예산의 1/3에 육박한다. 하지만 최근 가격 변동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산유국들이 타격을 받고 있다. 글로벌 무역전쟁과 청정에너지 전환기가 도래하면서 러시아는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식량은 러시아 외교의 새롭고 유용한 도구로 등장했다.

러시아는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는 지역들에 식량을 수출하면서 틈새를 노리고 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다. 2050년 지구상에 늘어날 20억명 인구 대다수가 살게 될 지역이다.

러시아·유럽의 최대 비료생산기업 중 하나인 '포스애그로' CEO 안드레이 구리에프는 "러시아가 그같은 식량 수요를 만족시키기에 적합하다"며 "러시아는 땅과 물, 항구, 철도를 가졌다. 그 어떤 나라도 러시아만큼 거대한 잠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로켓과 인공위성 경쟁에서 일부 이기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농업생산물에 대한 글로벌 수요는 왕성할 것"이라며 "전세계는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무기뿐 아니라 목초지와 청정수, 안전한 식량 등을 얻는다"고 말했다.

크렘린의 변화

러시아의 장기적 잠재력에 이끌린 투자자들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조지 소로스와 퀀텀펀드를 공동창업한 짐 로저스는 러시아와 중국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는 견해를 설파하는 사람이다. 그는 포스애그로를 통해 러시아 비료와 농업에 투자하고 있다.

로저스는 "러시아 농업의 발전은 이제 막 시작됐다"며 "만약 당신이 지도를 본다면, 러시아 농업이 전세계를 지배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러시아는 위대한 농업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 변화로 투자에 나섰다"며 "한차례로 그치는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크렘린에서 무언가 큰 변화가 벌어졌다. 한 명의 지도자를 넘어선 문제다. 매우 거대한 변화"라고 주장했다.

경제적, 기후적 조건에서 주요 경쟁국들 일부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과 비교해 러시아는 상대적 이점을 갖고 있다. 미국 농업기업들은 2019년 최악의 시즌을 겪었다. 저마진에 중국과의 무역전쟁이 겹친 때문이었다.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고 정부보조금이 사라지면서 이에 의존하던 수많은 기업이 파산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밀 생산량 역시 하락했다. 호주의 경우 초대형 산불로 작황이 매우 나빠졌다. 미 농무부는 2021~2022년 호주의 밀 수출이 전년 대비 17%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다.

러시아의 경우 기후변화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북쪽지역에 이용가능한 농지가 더 늘어나고 있다. 이는 남쪽지역의 가뭄을 상쇄하는 역할을 한다(내일신문 8월 30일자 21면 '기후변화로 바뀌는 경작지, 승자와 패자는?' 참조).

루스애그로트랜스의 로가체프는 "러시아는 다양한 기후지대를 갖고 있다. 만약 볼가강 유역에 가뭄이 든다면 시베리아에선 농작물이 잘 자랄 것이다. 만약 남쪽지역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볼가강과 중부지역이 이를 보상할 것"이라며 "러시아 모든 지역이 동시에 홍수나 가뭄으로 고통을 겪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안심할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비료를 사용하지 않거나 유해금속 함유량이 매우 낮은 비료를 쓴다는 것. 농업기업들과 애널리스트들은 "러시아 비료는 중금속인 카드뮴 함량이 적은 청정한 토양에서 만들어진다"며 "이는 러시아 농업에 추가적인 경쟁력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로저스와 같은 투자자들은 물론 러시아 사업가들도 이같은 미래 전망에 끌렸다. 러시아 농업의 거대한 규모와 다양한 기후지대, 탄탄한 인프라, 기술적 발전과 비료의 사용으로 수확량을 늘릴 여지가 크다는 점 등 덕분이다. 로저스는 "러시아는 가장 큰 잠재력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미래 전망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땅에 더 이상 투자할 수 없다. 미국 농부들은 이미 너무 많은 비료를 쓰고 있다. 미국은 이미 기계화된 농업을 갖췄다. 더 이상 기계의 도움을 얻을 수 없을 정도"라며 "캐나다는 농업에 대해 이미 매우 많은 걸 알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러시아만큼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반면 러시아 농업은 개선될 여지가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농업생산 효율성을 높이고 인프라를 확충하는 한편 금융적 접근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농업강대국 야심을 달성하려면 더 많은 투자를 유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2대 은행인 VTB은행은 농업계 개혁의 임무를 맡아 곡물시장의 가장 큰 플레이어로 활약하고 있다. 이 은행은 최근 수년간 굵직한 인수작업을 잇따라 성사시키는 등 곡물사업에 20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그리고 자산들의 절반을 러시아 투자자들에게 매각했다.

VTB캐피털 글로벌 원자재 헤드인 아타나스 듀말리예프는 "미국 농업 파생상품 시장은 약 1조달러 규모로, 수많은 참여자들이 있다. 덕분에 농업계와 기술이 발전했다"며 "반면 러시아는 효율성 사슬로 보면 맨 밑바닥에 있다. 러시아가 미국과 같은 시장을 조성하는 데엔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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