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은 6.25전쟁 당시 북한 남침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당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비밀해제된 미국의 외교문서와 각종 증거에 의하면, 당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정확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비한 상세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국 상원은 청문회를 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미 국무부차관보 히커슨은 6.25전쟁 당일 30명의 국무부 직원이 출근해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참석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군의 6월 25일 남침을 사전에 잘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퍼거슨 의원이 이처럼 대비한 이유를 물었다.

1948년 8월 19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최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존 케니 해군차관 겸 마샬플랜 책임자, 트루먼 대통령, 조지 마샬 국무장관, 제임스 포레스틀 국방장관, (두 사람 건너) 로스코 힐렌퀘터 CIA국장, (한사람 건너) 시드니 사우어스 NSC사무총장, 케네스 로열 육군장관 (맨 마지막은 미확인). 사진 트루먼 도서관 제공


퍼거슨 : 이같은 일로 30명의 국무부 직원을 동원한 이유가 무엇인가?
히커슨 : 이 일이 얼마나 복잡한 성격인지 의원님은 잘 모르고 계신 듯하다. 우리는 말리크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해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퍼거슨 : 말리크가 유엔안보리에 참석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무엇을 할 예정이었나?
히커슨 : 말리크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 우리는 유엔총회 특별회의 개최를 유엔사무총장에게 요청할 예정이었다. 30여명의 국무성 요원들이 말리크가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에 대비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유엔총회에 제출할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히커슨 차관보는 1950년 6월 25일과 27일 1차·2차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고, 6.25전쟁 관련 유엔결의안 작성과 유엔안보리 상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가 상원 청문회에서 퍼거슨 의원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미 국무부가 북한군 남침을 예상해 유엔결의안을 사전에 작성했고 △남침과 동시에 이것을 유엔안보리에 상정할 예정이었다는 사실 △남침 당일 30명의 국무부 요원이 출근해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안보리 복귀와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비해 준비했음을 실토한 것이다.


◆CIA국장 의회증언 막으려던 애치슨 = 미 중앙정보국(CIA) 초대 국장 힐렌퀘터도 의회 증언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히 예측했다고 증언했다. 조지워싱턴대학 리처드 쏜턴 교수가 쓴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에 따르면, 6.25전쟁이 터진 다음날인 26일 미국 상원세출위원회에 애치슨 국무장관이 출석했다. 애치슨은 '북한군 남침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다'며 '정보 실패'를 주장했다. 미 정보당국의 완벽한 정보 실패 사례란 애치슨 발언에 울화가 치민 상원세출위원장 케네스 맥켈러는 그날 오후 CIA국장 힐렌퀘터에게 의회 출석을 요구했다.

애치슨은 힐렌퀘터의 상원 출석을 저지하기 위해 그가 상원에 가기로 한 바로 그 시점에 트루먼 대통령에게 정보 브리핑을 하도록 일정을 잡았다. 화가난 힐렌퀘터는 의회 출석을 하려했다. 힐렌퀘터는 대통령에게 정보 실패 주장이 잘못임을 보여주는 형태의 문서를 제시했다. 대통령은 "진정 상원 출석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그곳에서 말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고 답변하자, 트루먼은 그의 상원청문회 증언에 동의했다.

상원에 출석한 힐렌퀘터는 중앙정보국이 트루먼 정부에서 고급정보를 접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배포해 준 자료들을 읽어 내려갔다. 북한군의 남침계획에 관한 구체적인 증거를 분명히 인용하고 있던 중앙정보국 판단서와 첩자들의 보고서들이다. 이들 자료를 보면 북한군이 38선 주변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병력과 전차를 집결시키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특히 북한군 남침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던 1950년 6월 19일자 문서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자 맥켈러 상원세출위원장은 "이같은 정보를 정부의 주요인사들에게 제공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힐렌퀘터는 "모든 정보판단서를 장관을 포함한 트루먼정부 주요인사들에게 제공해주었다"며 이들이 해당 정보를 수령했음을 보여주는 확인서를 제시했다.

그러자 힐렌퀘터의 상원 증언에 참석했던 미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 모두 CIA의 훌륭한 임무수행을 칭찬했다. 하지만 힐렌퀘터는 상원 증언 두달 후 CIA국장에서 해임됐고, 해군으로 복귀했다.

◆맥아더, 1950년 3월 '인민군 6월 남침' 보고서 = 맥아더의 후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1967년 출판한 책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서 미 CIA의 1950년 6월 19일자 보고서를 읽었다며 북한군의 남침을 예측했다고 밝혔다. 그가 전한 CIA의 해당 보고서는 '…38선 이북 지역에서 대규모 부대가 이동했다. 38선 부근 모든 북한 주민이 38선 이북 2킬로미터 넘는 지역으로 이주했다. 원산에서 철원으로 가는 모든 민간화물 노선이 전적으로 군용화물 운송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장한 군인들과 방대한 규모의 탄약과 장비가 38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리지웨이는 "6월 19일자 정보보고서를 읽은 사람 가운데 북한군의 남침 임박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미군 장교 출신인 슈나벨은 1992년 저술한 책 '한국전쟁 3권(The Korean War Vol. Ⅲ)'에서 CIA의 6월 19일자 보고서를 언급했다. 슈나벨의 책은 미 육군이 한국전쟁에 관해 공식적으로 저술한 매우 권위 있는 것이다. 슈나벨은 "(CIA의 6월 19일자 보고서를 본후) 당일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장 윌러비 소장은 '소련의 보좌관들이 지금이 정치적 수단을 이용해 남한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적시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결론지었다"라고 적었다.

실제 윌러비 소장은 1951년 12월 코즈모폴리턴이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극동군사령부가 은밀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정보 수집 및 분석조직을 운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수집한 정보를 워싱턴으로 전달했으며, 북한군의 남침이 있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에 북한군의 전쟁준비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말했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1년 6월 상원청문회에서는 기존의 '정보실패가 있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번복했다. 애치슨은 북한군 남침과 관련해 미국의 '정보실패는 없었다'며 그 증거로 극동군사령부가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를 언급했다. 윌러비 소장이 담당했던 1950년 3월 10일자 극동군사령부 보고서는 "인민군이 1950년 6월에 남침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적었다.

또한 슈나벨은 앞의 책에서 "1950년 4월 중순 미 공군 특수수사실(OSI)은 소련이 북한군에 남침을 명령했음이 분명하다고 극동 공군에 말했다. 1950년 5월 미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은 '북한군의 38선을 겨냥한 점진적인 이동은 이들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신성모 국방장관 '남침임박' 기자회견 =미군뿐만 아니라 한국도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1950년 5월 10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외신기자회견을 갖고 "북한군 부대가 38선을 겨냥해 대거 이동하고 있다"며 "북한군의 남침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북한군 병력이 18만3000명에 달하고 17대의 전차와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제시했다. 북한군 남침으로 확인된 결과, 그의 발표는 거의 사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1950년 5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군이 38선 부근으로 집결하고 있다"라며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 문제를 유엔과 미국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무기를 제공해 주는 경우 '한국이 북침할 것'이라는 '부질없는 걱정'을 하는 '미국의 친구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와 극동군사령부는 한국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남침 임박 주장을 묵살했다.

또한 1950년 6월 25일 미 국무부는 유엔사무총장에게 6.25전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는데, 이 정보는 한반도에서 무초 대사가 보낸 최초 보고서와 내용이 달랐다. 미국은 무초가 보낸 전문에 의해 북한군 남침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스톤이 1952년 쓴 '한국전쟁의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있던 어느 국가의 대사도 남침 또는 북침 여부에 관해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를 보면, 무초대사가 국무부장관에게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에 전쟁 발발을 최초로 알린 문건은 '한국군의 보고에 따르면, 보도에 따르면, ~인 것 같다'는 등 단정적 표현을 삼가고 있다. 그런데도 미 국무부는 유엔사무총장에게 제출한 문서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단정하고 있다. '추정'과 '확정'의 차이를 모르지 않을 미 국무부가, 유엔에 제출하는 매우 중요한 문서에 단정적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의문이다. '한반도와 강대국의 국제정치'를 쓴 권영근 박사는 "이는 당시 미 국무부가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6.25전쟁 3일전 미 국무장관 보좌관 덜러스가 전쟁 발발을 예견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1일 도쿄에서 덜러스는 맥아더 사령관, 존슨 국방장관, 브레들리 합참의장과 회의를 했다. 회의후 덜러스는 기자들에게 "조만간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Positive action)를 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적극적 조치란 국제사회의 평화, 안전 및 정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사회에는 서구세계뿐만 아니라 극동지역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스톤은 앞의 책에서 "당시 덜러스가 말한 적극적인 조치는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에 따른 6월 27일 태평양지역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항한 미국의 대규모 개입이었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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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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