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서울시 양천구청장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4월 취임 직후 서울시구청장협의회 임원진과의 상견례에서 "시정과 구정의 경계가 명확히 없다"며 협치행정을 약속한 바 있다. "시정이 구정이며, 구정이 시정이다"라는 원칙 하에 시와 구는 공동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번에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한 2022년도 예산안에서 마을공동체와 민관협치 등의 예산을 대거 삭감하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의미를 크게 훼손했다. 이는 '참여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자치분권이라는 사회적 대합의'를 거스르는 것이며,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며 공동체적 가치를 지켜온 시민들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다.

내년 서울 예산, 민관협치 분야 반토막

'서울시 바로세우기'라는 오 시장 시정운영 방침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이번 예산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적 경제 민간위탁 사업비를 47.1% 줄였고, 주민자치 민간보조금은 49.3%를 삭감했다. 민관협치 예산을 그야말로 반토막 낸 것이다. 오 시장은 특정 시민단체 보조금사업 및 민간위탁 예산을 줄여서 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쓰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울시가 정상화되고 바로 세워진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민관협치보다 관(행정기관) 주도의 사업수행이 더 효율적이고, 이렇게 해야 시민의 삶이 더 행복해진다는 전제를 통해 도출됐다. 협치를 통한 의제발굴과 공감정책으로 참여와 자치라는 민주주의 발전의 성과를 하나씩 거두고 있는 지방정부 입장에선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이번 예산안에서 삭감된 예산은 마을공동체 주민자치 청년 사회적경제 등 대부분 10여년 간 이어오던 시 역점사업들인 동시에, 주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시와 자치구가 함께 발맞춰온 지방자치의 대표 성과들이다. 차근히 올라가고 있는 계단을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은 꼴이다.

더욱이 작년 말 통과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내년부터 시행돼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이 예고돼있다.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와 혼동해서 사용할 만큼 제자리 걸음을 하던 지방자치의 의미가 주민이 직접 정책 집행에 참여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역사적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자치와 분권은 시대적 흐름이라는 사회적 대합의가 이뤄졌으면 정책과 제도가 이에 맞춰지고 예산이 뒤따르는 것이 수순이다.

협치와 지방분권의 가치 훼손 않기를

긴밀한 협조를 약속했던 오세훈 시장이 전임 시장 지우기와 소통 없는 일방통행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정책에 견해가 다르거나 문제가 있다면 합리적 토론과 설득을 통해 수정하고 개선하면 된다. 새롭고 빠른 변화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행정의 안정성과 연속성이 유지될 때 가능한 일이다. 시민의 "더 좋은 삶"이라는 시정이자 구정의 목표를 설정했다면, 시민의 참여는 더욱 독려하고 정책과 공약도 같은 방향으로 이를 응원해야 하는 것이 행정의 기본이다.

서울시는 그동안 일관된 비전을 가지고 착실하게 진행돼 온 협치와 지방분권의 기본가치를 훼손하는 일을 멈추고, 항상성 있는 행정으로 서울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협치를 역행하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퇴행이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시대착오적 결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민이 구민이고 구민이 시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