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별로 예산·권한 이양 실험

행정 편의주의·주민 인식↓ 한계

법제도 개선 '주민주권' 구현요구

"동네 골목길이 무척 어두웠어요. 저녁이면 노약자나 여성들은 다니기 꺼려했어요. 꽃을 심어서 환하게 만들어보자 했어요. 봄이면 장미·철쭉이 피고 가을이면 담쟁이넝쿨과 낙엽이 어우러져요."

서울 금천구 시흥3동 주민들은 수년째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며 꽃을 가꿨다. 골목은 원래 이름 대신 '장미길'로 불린다. 장미넝쿨이 타고 오른 아치에 형형색색 조명을 밝히고 축제·사진전을 더했더니 이웃 동네까지 소문이 났다. 골목을 피하던 주민들이 걷기를 즐기고 심지어 꽃길을 보기 위해 마을버스에서 내린다. 4년간 주민자치회장을 역임한 김명자(70)씨는 "안전한 길이 된 건 물론 시흥3동뿐 아니라 금천구 명소가 됐다"고 전했다.

주민자치, 참 재미나요│우리동네 관리사무소를 운영하는 중구 주민들이 활성화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코로나19가 완화된 시점, 방역지침에 맞춰 행사를 진행했는데 참여한 주민들 표정이 밝다. 사진 중구 제공


◆씨앗 뿌리고 싹 틔워 = 주민들이 스스로 동네 문제를 발굴하고 이웃과 머리를 모아 해법을 찾는 주민자치가 척박한 토양 속에서도 어렵사리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민선 8기에는 관련 법·제도 정비를 정비하고 주민들 움직임을 활성화해 본격적인 주민자치, 주민주권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주민들은 정부의 투명페트병 분리수거와 발맞춰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이웃과 나누는 벼룩시장을 준비하고 있다. 주민들은 낭비를 줄이고 재활용이나 환경보호 효과를 얻는 동시에 개개인이 '나도 지역에 보탬이 된다'는 자부심을 느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주완(65) 주민자치회 두레(복지)분과 위원은 "여전히 지켜보기만 하면서 불만을 표출하는 주민도 있다"면서도 "동네발전에 좋은 쪽으로 의견을 좁혀가는 이런 게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강조했다.

도시에 비해 지역이 방대하고 공공서비스 혜택이 상대적으로 적은 농촌지역에서는 주민들 움직임이 삶의 질을 바꾸는 직접적인 매개가 된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과 전남 영광군 묘량면이 대표적이다.

안남면 주민들은 노인들을 위한 어머니학교와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방과후학교는 물론 교통약자를 위한 면내 순환버스에 주민목욕탕까지 직접 운영한다. 사회적경제를 접목한 로컬푸드사업까지 중앙정부 공모사업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묘량면 주민들은 여민동락공동체를 꾸려 활동 중이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동네에서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동네마트인 '동락점빵'을 차렸는가 하면 폐교통지를 받았던 초등학교를 전교생 20명이 넘는 학교로 되살렸다. 주민들은 주간보호센터까지 설립해 운영하면서 그동안 소외됐던 노년층에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며 농촌복지모델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들뿐 아니라 폐교 위기를 맞은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방화후학교 교사로 나서 아이들을 돌보고 농촌까지 의료서비스가 닿지 못하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의료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다. .

◆권한 내려놓고 중간조직으로 지원 = 시범 사업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온전하게 주민들 힘만으로 된 건 아니다. 일부 자발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상당수 지자체가 단체장과 공무원 권한을 내려놓고 주민들 움직임을 지원한 결과물이다.

마을마들기 마을공동체에 이어 일찌감치 주민자치회를 특화한 서울시는 자치구 단위에서 주민자치사업단을 운영하도록 지원했다. 전문 인력을 채용해 주민들이 마을 일에 눈을 뜨고 함께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동마다 지원관이 나가 주민들이 '왜 모였는지'부터 인식하고 활동하도록 하는 형태다. 백연록 은평구 주민자치사업단장은 "주민 개개인에 더해 주변 주민들의 목소리까지 반영하고 분과가 활성화되면 이전의 '관변단체'처럼 행정의 '거수기'가 아니라 '마을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하면서 주민자치회는 '자치분권 종합계획'에 담겨 주민 대표성을 강화하고 주민주권을 실현하는 창구로 제도화됐다. 2021년 10월 현재 전국 16개 시·도 내 135개 시·군·구에서 912개 읍·면·동단위 주민자치회를 운영하고 있다. 전국 3492개 읍·면·동 가운데 1/4이 넘는다(26.1%).

중앙정부가 움직이면서 지자체 발걸음도 빨라졌다. '주민세를 돌려준다'고 선언한 곳들이 많다. 주민들 주머니에 되돌려준다는 건 아니다. 주민세로 거둬들인 예산만큼은 각 읍·면·동 주민들이 직접 쓰임새를 결정하도록 한다는 의미다.

실질적인 행정 권한을 주민들에 넘기는 실험도 여럿이다. 동장을 주민투표로 선출하거나 5급 이상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간부회의에 동별 주민자치회장이 참여하기도 한다.

서울 중구는 아예 '동정부'를 표방한다. 동정부과를 신설해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사무이양을 하듯 주민생활과 밀접한 77개 사무를 동으로 이관했다. 동주민센터는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는데 최고 결정권자는 주민자치회다.

우리동네관리사무소는 주민자치회에서 운영하는 동주민센터나 마찬가지다. 사무소당 15명 안팎으로 주민들이 근무하면서 동네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개념인데 청소 광고물정비 골목시설물관리 안전순찰 교통안전 주택유지관리 택배보관 등 사업을 공통적으로 한다. 공유주방 빨래방 공유서가 등 특화사업도 있다.

◆지방에 행정 이양하듯 주민 역할 구분해야 = 아직 시범단계라 주민자치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는 미흡하다. 경기연구원이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3.2%가 '들어는 봤다'고 하지만 관련 내용도 알고 있는 경우는 33.5%에 불과하다. 정책 효과에 대해서도 절반이 넘게(54.0%) '보통'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긍정적인 응답(16.9%)보다 부정적인 응답(29.1%)이 훨씬 많다. 오는 6월 선거를 통해 꾸려질 민선 8기에 지자체와 의회가 풀어가야 할 과제다.

전문가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시대적 흐름인 주민자치를 활성화할 묘책을 주문한다. 주민자치회를 법령에 담아 제도화하자는 요구가 첫째다. 예산 편성과 주민참여를 활성화할 행정적 지원 등을 제도적으로 명시하자는 주장이다. 국회에서 주민자치기본법 제정 움직임이 있고 민간에서는 아예 개헌을 요구한다. 백연록 단장은 "수차례 회의를 하고 사비를 털어 경조사를 챙기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는 얘기도 나온다"며 "주민자치활동이 '불편하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는 벽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친 행정 편의주의도 걸림돌이다. 주민 참여와 자치에 익숙하지 않은 행정조직이 일부 '이야기가 하 통하는' 주민 대표와만 사업을 진행, 오히려 악용되는 사례도 여럿이다. 몇몇 대표와 행정의 유착, 그로 인한 주민간 갈등이 이어지는 이유다.

서정민 위원은 "주민자치를 하나의 영역이나 행안부 정책사업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주민자치는 행정처럼 전 영역에 걸친 사안이고 지방자치가 30년에 걸쳐 성숙돼왔듯이 제대로 자리잡기까기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유럽 등 선진사회에서도 사회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주민참여가 필수라고 여긴다"며 "법적 근거를 마련하되 그 틀에 매이지 않고 행정과 주민의 역할을 구분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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