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규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

5월 19일 서울에서 열린 '2022 세계 경제·금융 컨퍼런스'에서 '닥터 둠'(비관론을 펴는 경제학자)으로 잘 알려져 있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미국 유럽 등의 경기가 경착륙할 확률이 60% 이상이다. 그것도 2년안에"라고 지적했다. 그는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해 명성을 얻었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이에 동의하면서 "한국도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해서 주목을 끌었다.

인플레이션이 세계적 과제로 등장하면서 미국 연준(Fed)을 필두로 각국 중앙은행의 고강도 금리인상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로 인한 경기침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전망이 향후의 세계경제를 바라보는 한가지 주요 견해를 이룬다. 미국 연준의 일부 강경파 이사들이 이에 동조한다.

이 견해는 1990년대 초의 침체, 2000년대 초의 닷컴버블, 2007~2008년의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지난 30여 년간 미국 연준이 보여준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확장으로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면 이를 억제하기 위해 연준은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기준금리인상은 유동성을 조이고 수요를 억눌러 경기침체를 유도한다. 이에 연준은 다시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양적완화까지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중국이 내수경기를 살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리고 있으며, 일본은 제로금리 정책을 여전히 고수하는 중이고, 유럽 또한 영국중앙은행을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경기악화와 공급망 및 에너지난 때문에 금리인상의 여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지금의 세계적 인플레이션은 이전과 달리 기본적으로 공급망의 문제와 저비용생산의 애로에서 온 것이며, 여기에 우크라이나전쟁과 코로나 이후의 수요회복이 숟가락 얹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혼자 금리인상을 통해 수요를 억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저물가시대 막 내린다고 보는 게 타당

또 한가지는 지난 30여 년을 특징짓던 저물가와 저금리를 지탱했던 요인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지난 30여년은 일본에서 보듯이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시대였다.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우려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세계화 과정에 본격적으로 들어 온 중국의 역할이 컸다. 중국은 낮은 생산비용으로 세계의 공장이라 불렸는데 이제 그 역할이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저물가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전망이 더 타당해 보인다. 미중간의 공급망 재편 갈등이 그 반증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으로의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전망하기 위해 다른 시각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루비니 교수나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의 비관론이 언론의 보도에서 채 사라지기 전인 5월 24일 삼성계열사들은 2026년까지 반도체 차세대통신 등을 중심으로 450조원(국내 투자 360조원)을,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국내에 4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롯데그룹과 한화그룹은 앞으로 5년간 각각 37조원, 37조6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SK의 247조원, LG의 106조원, 포스코의 53조원 등이 뒤를 이었다. 그 후로도 대기업의 투자발표가 이어졌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얼추 5년간 1000조원에 이르는 투자규모이고 일자리도 30만개가 나온다. 이를 두고 경제단체를 중심으로는 "신정부의 친기업 행보에 화답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즉 국내투자를 소홀히 한다는 지적을 불식하고 밉보이지 않으려는 정치적 결정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또는 언론을 중심으로 위기에 움츠러들지 않는 한국기업의 도전정신이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평가들은 이미 세계적 기업(군)으로 성장한 한국 기업들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합리적인 분석과 계산없이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위의 세계적 기업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국내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대기업(그룹)의 투자가 실행될지 아닐지가 결정된다는 과거의 의구심을 바닥에 깔고 바라보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투자환경의 변화가 대기업 투자 이끌어

그렇다면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이들 투자의 경제적 동기는 무엇일까? 디플레이션 혹은 저물가 시대에서 인플레이션 혹은 고물가의 시대로 옮겨가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들 기업(군)의 실물투자는 대단히 합리적이다. 지난 3, 4월 미국의 소비자 물가는 8%대였다. 그리고 빅스텝(기준금리 0.5%p 인상)이후에도 미국의 10년물 국채금리는 3%에 근접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5%의 음(-)의 실질금리가 보장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투자환경이 어디 있겠는가? 3%에 빌려서 아무 것도 안해도 8%를 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미국 혼자의 힘으로 쉽게 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이라면 음의 실질금리는 상당 기간 유지될 것이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