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외면한 독립운동가' 학술회의 … "서훈 문제, 역사적 근거에 초점두길"

#. 귀족의 직위를 받은 자로서 조선 안에서 독립을 주장한 사람은 김윤식 이용직 양씨가 있었으나 해외에 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사람은 오직 혼자이며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연고한 사람으로 조선 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을 받았으며 상해에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지년에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하여 추위가 극에 다다른 가운데 이 세상을 마쳤더라.(동아일보 1922년 7월 7일자)

2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대한민국이 외면한 독립운동가-서훈의 당위와 방법' 학술회의가 열렸다. 사진 이의종

 


2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대한민국이 외면한 독립운동가-서훈의 당위와 방법'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 열린 학술회의는 (사)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시민모임 독립, (사)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2차동학농민혁명참여자 서훈국민연대가 공동주최했으며 광복회가 후원했다. 학술회의에서는 동농 김가진 선생 등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서훈을 수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가진 국장에 김 구 등 조문 = 동농 김가진 선생에 대해서는 임시정부에서 그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음에도 오늘날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아일보 1922년 7월 7일자 기사는 그가 상해 망명 이후 독립운동을 하며 극빈한 삶 속에 서거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날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는 "1922년 7월 4일 김가진은 그의 거처인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상하이로 망명온 지 3년이 되는 해로 그의 나이 77세였다"면서 "조문객으로는 이동녕 박은식 김 구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 홍 진 신익희 여운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름을 올렸다. 국내에서도 유림연합대회 주관으로 상소가 꾸려졌으며 많은 이들이 조문을 하고 부의금을 놓고 갔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당시 일본 언론과 보고서에서 다룬 김가진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조명했다.

조선군 참모부는 1919년 6월 2일 "5월 23일 경성에서 남작 김가진 자작 이재면 동 권중현 및 민영달 외 20명 이상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이 있다는 정보를 5월 22일 밤 수령해서 경성 경비부대는 지엄한 배치를 취하고 경계를 맡기고 동시에 경무기관의 행동을 원조했다"고 밝혔다.

고쿠민신문은 1919년 11월 28일 임시정부의 동향과 관련해 "이 일파에는 아직 거두가 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 공사를 지내고 김옥균 시대에 농상과 문상을 역임한 남작 김가진이다. 그는 병합 이후 관직에 나서지 않고 돈에는 관심이 없어 거의 자포자기했었다. 총독정치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저주자였던 그는 이번 봄 3월 폭동사건 이전 독립의 거사를 도모했는데 이는 공교한 총독부의 손에 의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고 끝났다"고 밝혔다.

◆"장례식의 역사적 의미 반영돼야" = 이에 따라 이 교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역사적 근거에 초점을 두고 서훈 문제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1922년 7월 임시정부 집례로 거행됐던 동농 김가진 장례식의 역사적 의미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서훈 정책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말했다.

임재경 전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장은 기념사에서 "조선민족대동단은 경술국치 이래 우리 민중이 조직한 최초이자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라면서 "김가진 선생은 대동단 총재로서 3.1 운동 이후 항일운동을 이끌었고 칠순의 노구를 채찍질하며 망명을 결행,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힘을 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직 서훈받지 못했고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그의 유해는 여전히 상하이 쑹칭링능원 한구석에 잠들어 있다"면서 "80명 이상의 조선민족대동단 단원이 독립운동가로 서훈받았다. 하지만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는 서훈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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