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

물가폭등이 불안하다. 리터당 2000원이 훌쩍 넘어버린 주유 가격표를 바라보는 서민들의 마음이 무겁다. 전력 예비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언론이 블랙아웃(대정전)과 브라운아웃(공급규제)을 우려한다. 7~8월 폭염을 어떻게 견뎌낼지 겁난다. 세금으로 사는 여야 정치권 사람들은 아직 인플레 압력이 피부에 와닿지 않은 모양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겐 이미 공포로 다가온다.

유럽에선 가스가격 폭등이 산업을 마비시킬 위기에 있다. 독일의 가스가격은 원유 기준 배럴당 280달러와 맞먹는다. 값싼 휘발유에 익숙했던 미국인들은 100달러를 지불해야 자동차 연료탱크를 채울 수 있는 현실에 놀란다.

50년 전 석유파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중심 중동 국가들의 석유금수조치가 일으킨 파동이었다면 이번엔 거대 산유국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벌어진 사단이다. 에너지를 무기로 전쟁을 계속하는 푸틴의 행태를 보면 에너지 위기는 악화할 일만 남은 것 같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체제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합류로 안보 연대를 한층 강화시켰다. 그러나 나토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전폭 지원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자칫 푸틴을 자극해 3차대전이 터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오히려 러시아 기 살려준 경제고립전략

그래서 나온 대안이 미국이 주도하는 러시아 경제고립 전략이다. 즉 나토와 민주주의 가치동맹국들이 푸틴의 전쟁 돈줄인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하면, 금고가 고갈된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거나 정전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많은 서방 전략가들은 그 전략이 효과를 볼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러시아 에너지의 지정학적 위력은 서방의 의도를 뛰어 넘었다. 서방의 에너지 금수조치로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량은 줄어들었지만 가격폭등으로 이익폭이 크게 늘어나 러시아의 재정은 오히려 예상보다 튼튼해졌다. 러시아 재무장관은 미국을 비웃듯이 "4월보다 5월 석유수출액이 60억달러 늘었다"고 큰소리쳤다.

러시아의 숨통을 터 준 것은 중국과 인도의 금수제재 불참이다. 5월 중국과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을 합치면 하루 240만 배럴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에 국제유가의 30% 할인 가격으로 판다. 그렇지만 국제 유가폭등으로 할인해 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출액을 올린다.

에너지 최대 소비국인 중국은 이 기회에 안보 차원의 비축용 석유와 가스를 확보하는 실리를 취하는 한편, 시진핑-푸틴 정상회담에서 밝힌 중국과 러시아 협력 강화의 약속을 이행하는 명분을 얻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꺼려한다.

인도는 미국 호주 일본과 함께 쿼드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중립 입장을 내세우고 러시아 석유 수입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인도의 지난해 러시아 원유수입은 하루 3만3000배럴이었지만 지난 6월 115만배럴로 폭증했다. 인도는 러시아 원유를 정제해 서방세계로 팔며 이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에너지 공급은 지금 초비상이다. 독일 등 유럽으로 연결된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을 관장하는 러시아 가스 회사 가즈프롬이 6월에 가스 공급을 60%나 줄여버린 것이다. 이 사태로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에선 전기료와 천연가스 가격이 사상 최대로 뛰었고 에너지 산업은 붕괴 직전에 있다. 러시아 가스 수입을 총괄하는 독일에너지 회사 '우니퍼'는 누적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구제금융절차를 밟고있다. 기후위기의 원인이라며 폐쇄했던 석탄발전소를 수선하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11월 말까지 비축시설 용량의 80%를 채우기로 합의했다. 독일의 경우 62% 정도 채웠지만 가즈프롬이 언제 공급을 완전히 중단할지 모른다. 만약 이 여름에 푸틴이 가스관을 잠궈버리면 유럽은 내년 1월 천연가스 고갈 대란을 겪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곳곳에서 에너지 위기를 가속시키는 일들이 터지고 있다. 프랑스 전력공급의 70%를 담당하는 원자력 68기 중 절반이 기술적 문제로 가동중단 상태다. 유럽 최대 가스생산 국가 노르웨이는 노동자 파업으로 공급중단 위기다.

한국은 에너지 위기 감당할 준비 됐나

6개월째 접어든 우크라이나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석유수출 이익이 늘어나자 푸틴도 한결 느긋해져서 종전을 서두를 마음이 없어진 듯하다. 러시아 에너지 금수조치로 푸틴의 기를 꺾으려던 미국과 유럽의 계산은 크게 빗나갔다. 오히려 올 겨울 유럽의 에너지 상황이 푸틴의 손에 달려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석유증산을 부탁하려고 내켜하지 않던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를 만나러 간다.

세계 에너지 정치 지도가 불안정하게 바뀌고 있다. 한국은 견딜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가.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