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경 변호사

2020년 9월, 굴지의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최소 수백억 또는 수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모바일 반도체 특허사용료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미국 법원 배심원단의 4억달러(약 4400억원) 배상 평결과 그에 기초한 1심 재판부의 2억달러(2230억원) 배상 판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구조적 불평등 개선할 제도보완

기술분쟁은 비단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문제만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가해기업의 규모에 불문하고 피해기업에 대한 기술보호 조치는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기술침해 발생 이후 분쟁을 대응하는 과정에서 가해기업 규모는 실체적 진실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의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술침해 양상과 규모, 기술 난이도, 소송대응 과정 등에서 확연한 차이가 발생한다. 분쟁해결 과정에서 구조적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시점이다.

굴지의 대형로펌을 선임해 분쟁에 대응하는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변호인 선임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소송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측의 주장에 법원의 심증이 기울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자유심증주의에 따른 당연한 이치다.

법원 역시 기술심리관, 전문심리위원, 감정인 제도 등을 두어 기술적인 사항에 관해 재판부 이해와 판단을 보조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소송과정에서는 1인의 전문가 의견만을 참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도화된 기술침해 사건의 경우 소송기록만 1만쪽이 넘는다.

소송상의 실체적 진실 구현 방법이 실제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참여한 기술분쟁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분쟁기술은 어렵고 복잡했으며, 1심은 대기업과 대형로펌의 일방적인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중소기업의 전부 패소였다. 그러나 항소심은 달랐다. 기술보호에 뜻을 같이하는 여러 기술전문가 법률전문가가 모인 각고의 노력 끝에 일부 승소했다. 일반 민사사건의 최소 10배 이상이 되는 노력과 시간 투입이 필요했다. 공익재단의 지원과 여러 전문가들의 자원이 없었다면 중소기업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소송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중소기업의 85.6%가 도입 찬성

기술침해 소송에 있어 복수의 전문가 도움은 필수다. 특정분야 기술을 연구하고 현장에서 기술을 접해본 전문가들로 구성된 합의체 토론과 평가 절차가 담보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소송이나 조정 절차 내에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면서 분쟁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 배심제 도입이 절실하다. 기업 규모와 자본력이 실체적 진실을 좌우하는 구조적 문제점은 개선되어야 한다.

최근 진행된 설문조사(한국갤럽, 재단법인 경청)에 의하면 중소기업의 85.6%가 기술침해 사건에 있어 전문가 배심제도 도입을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 배심제도는 법원의 사법적 권한을 변경하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이도 기술분쟁 사건에 있어 법원의 업무적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전문가 배심원들의 충분한 토론과 합의를 거쳐 나온 기술적 참고자료는 침해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보장하고 법원에게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