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

주민번호 제도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지적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사건 사고의 발생원인이 주민번호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22일에 알려진 '수원 세모녀 사건'은 결론부터 말하면 복지전문가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지적하는 복지 지원 인력의 한계나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의 한계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건복지부 단일 부처에서 도저히 손 쓸 길 없는 엉뚱한 곳에 원인이 있다. 바로 민원 직접 신청주의의 뿌리인 주민번호에 문제가 있다.

전세계 어디서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는 국민식별번호를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사용한다면 이는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국가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국민 당사자는 직접 나서서 정책의 세부내용을 잘 숙지해야 함은 물론 '행복e음'이라는 멋진 이름의 컴퓨터 정보시스템에 직접 접속해 작업하지 않으면 신청이 불가능하게 돼있는 모순 또한 이 번호 하나로 인해 생기는 일이다. 복지를 베풀려는 공무원이나 다른 누가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더라도 그보다 상위의 제한 장치인 개인정보보호로 인해 대신 건드릴 수 없게 돼 있다.

이렇듯 주민번호는 타인 도움 완벽차단 기능까지 지닌 '절대번호'다. 그 번호 하나로 국민 개개인 동선을 전부 파악하는 일도 가능한 '만능번호'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곧 폐기 처리해 버려야만 할 수준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를 잘 아는 입장의 누구도 예외없이 자신의 고유번호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룬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길들여져 온 탓이다.

국민식별번호 사용하는 선진국은 없다

국민식별번호를 보유하는 국가 수는 70개국이나 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을 허용하는 나라는 단 두 나라, 한국과 중국뿐이다. 68개국은 일상에서 번호를 사용할 가치를 발견하지 못해 국가 서랍 속에서 그냥 보관만 돼있다. 중국은 사용을 강요하지는 않으나 성인(16세)이 되면 본인이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알아서 신청할 수 있게 해 우리와는 다르다.

존엄성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을 물건에 대해 고유식별번호를 사용한다면 반감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세계 어느 선진국도 그런 번호 없이도 문제없이 국가나 사회가 잘 관리되고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매우 당혹케 한다.

그런 선진국들이 일상에서 전혀 쓰지 않는 이유는 아무리 효율적일지라도 물건이나 짐승이 아닌 인간을 번호 하나로 처리하는 게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인간 예우 기조에서 출발한다. 국격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디지털시대라고 아무 데나 무조건 효율만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름과 주소만 가지고도 개인식별이 충분하다는 믿음이 강하고 또 그게 정답이다. 처리속도가 느려지는 일도 없다. 번호 사용 강요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 공무원들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대통령도 그럴까.

전임 대통령 중에는 그 번호가 적국의 손에 모두 다 넘어가 국가안보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민번호 폐지를 포함해서 개선방안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린 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지나갔다. 괴물 번호를 대상으로 자신의 직을 내거는 위험을 택하는 어리석은 각료가 있다고 보는가.

다시 말하면 복지문제를 보건복지부 자체 안에서 풀 길이 없고 더 나아가서는 국가 안보문제를 국방부를 비롯한 어느 일개 부처 내에서 독자적으로 풀기에는 역부족인 현상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논리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복지 정보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각지대를 찾는 특단의 조치"를 주문했다. 그러나 신청주의의 폐단은 아마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번호사용을 없애버리기 전에는, 당사자가 스스로 먼저 손 내밀도록 강요하는 번호제도를 손보기 전에는 소외격리자를 발굴할 방법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이름 주소만으로도 복지행정 가능

우리가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어디나 만연한 직접신청주의에 기인한다. 행정 흐름이 항상 민에서 관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따라서 발품(옛날)이나 손품(요즘)을 스스로 팔지 않으면 되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찾아가는 행정'이란 말은 공무원들이나 하는 입에 발린 구호일 뿐이다. 이런 주민번호의 역습을 정부각료를 포함한 공무원 집단도 물론 잘 안다. 따라서 사건 단초를 제공한 정부 자신이 사건 공범이 돼버리는 것이다. 신청주의가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주민번호 대신 주소 성명을 사용하면 우체부가 집을 찾아가듯 모든 문제가 풀린다. 이 우체국행정 철학이 번호행정을 거부하는 국가에서 채택되는 인본주의 전통이다.

애초 관을 향해 가게 돼있는 복지행정의 방향을 이제는 반대로 설정 변경해줘야만 한다. 번호를 거부할 수 없다면 이런 사건은 숙명적으로 재연될 것이다. 아무 반향없는 대통령 지시 역시 허공 속에서 맴돌기를 반복할 것이다.

문송천 카이스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