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어린 시절 살림이 넉넉지 못해 반찬이 김치뿐이었던 적이 있었다. 도시락으로 싸 간 김칫국물이 새서 가끔 책가방이 엉망이 되기도 해 일부러 도시락을 안 가져가 어머니가 속상해하셨다. 반찬이 변변찮아서 도시락을 안 가져간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어머니도 필자 생각을 아셨을 것 같다. 도시락뿐만 아니라 준비물도, 등록금도 제때 못 가져간 것도 여러차례였다.

필자는 형편을 알면서도 어머니께 투정을 부렸고 때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나를 달래셨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시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미안해 할 필요 없다. 없이도 살고 그런 거지 어떻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겠나."

아버지는 핍절함으로 인한 자녀들의 불편에 대해 별로 미안해 하지 않으셨다. 이후 부모님이 바쁘셔서 졸업식에 오지 못하셨어도, 돈이 없어 내 꿈을 포기할 때도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가난을 탓하지 않았다. 가난이 싫기는 했지만 가난 때문에 기가 죽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것일 뿐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가난은 불가능과 무능함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고, 계급화되기 시작했다.

가난 언제부터인가 계급화되기 시작

최근에는 흙수저 금수저의 계급론이 생겨났다. 토대의 차이가 계급의 차이로 굳어진다는 것이 요즘 세대의 도그마가 되어버렸고 가난은 천한 계급이고 부끄러운 것이며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자유와 독립은 인간 존엄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가치들이다.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존엄성이 추구될 수 있다. 살다 보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만나고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삶의 안전장치가 깨어지고 울타리가 무너지기도 한다. 이 상황이 고착되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늪이 되기 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헤쳐나올 수 있다면 참 다행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누군가의 무너진 삶을 보수하고 혼자 뛰어넘기 어려운 갭을 메꿔주거나 징검다리를 놓아줌으로써 자력으로 살 수 있도록 재활의 기회는 주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더욱 불안정해서 국가나 사회, 가정이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기도 한다.

난민, 방치된 아동, 장애인, 생존을 위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결핍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좀 더 길게 도움을 제공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의지와 기회를 갖도록 내면의 힘을 북돋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병은 감추지 말고 자랑해야 치료할 방법을 찾는다. 가난도 마찬가지다. 가난은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잘 다루어지고 해결되어야 할 상황이고 문제다. 언젠가부터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비극이 되었다. 가난뿐만이 아니다. 배움의 결핍, 장애, 부모 없이 자라는 것이 부끄러움이 되어버렸다. 부끄러움은 입을 다물게 한다.

가난 때문에 숨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

세모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참다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잇다른 세모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과연 어떤 대책이 최선일까. 부끄러워 숨은 사람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숨은 이를 찾아내는 방법을 고민하기보다 가난 때문에 숨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해결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