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기업은 미중 기술패권전쟁 틈바구니에 놓여 있다. 세계경제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를 대비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특히 자국 우선주의가 무엇보다 강조되는 마당에 국내기업은 정부 정책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8월 미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국내 전기차 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 현지 전기차공장이 준공되는 2025년까지 국내 전기차는 미국시장에서 세액공제(1대당 최대 7500달러) 혜택을 받을 수 없어서다. 이 법은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 세액공제 혜택을 지급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가격경쟁력을 잃은 국내 전기차 10만대 이상의 수출 차질이 예상된다는 업계 전망이다.

기업들 민간외교 나서는데 정부는 도움 안돼

10대 그룹은 지난 5월, 앞으로 5년 간 1000조원대 투자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출범 초 정부 뜻이 반영된 면도 있겠지만 어쨌건 과감한 민간투자 의지를 보인 것이다.

기업들은 민간외교에도 적극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날 바이든으로부터 미국 반도체 제조시설 등에 17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데 대한 감사인사를 들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바이든과 만나 추가 50억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바이든은 "100억달러가 넘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제조업 투자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번 투자 결정에 절대 실망하지 않도록 미국정부도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7월 백악관을 방문, 코로나19 감염으로 관저에 머물던 바이든 대통령과 화상면담을 했다. 최 회장은 반도체 등에 220억달러 규모의 미국 추가투자를 약속했다. 이와 함께 SK그룹은 지방에 앞으로 5년간 67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혀 국내투자와 국토균형발전에 힘을 보탰다.

민관이 합동으로 추진하는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전에 기업들이 전방위적으로 나섰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주 멕시코와 파나마를, 최태원 회장은 이번주 일본과 미국을 각각 방문해 부산엑스포 유치활동에 나섰다. 각 그룹 경영진들도 유럽·중앙아시아(SK) 아프리카(현대차) 동남아(삼성)를 방문하거나 초청해 부산엑스포 지지를 요청했다.

이처럼 국내기업들은 본업인 영업활동뿐 아니라 민간외교에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에 돌아온 것은 가혹한 규제와 장애물이다. 주요 기업의 투자 확대에 대한 미국의 대답은 전기차 세액공제 혜택 제외였다. 자동차뿐 아니라 반도체와 배터리 바이오 등에서도 미국 주도 공급망 구축을 추진해 한국기업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미 의회에서 IRA가 통과될 때까지 한국정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블룸버그는 이번 법이 지난해 나온 '더 나은 재건법'(BBB)보다 도요타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 협회 정부가 움직인 일본 로비력의 결과로 본 것이다. 최근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을 비롯 정부 각 부처가 미국 관계자들을 만나 IRA 부당성을 호소하며 개정 필요성을 강조하는 활동을 벌였지만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이다.

원료와 중간재를 서로 사고파는 한국과 중국의 무역구조 하에서 미국 위주 공급망 재편은 우리나라 관련 산업의 위축을 가져온다. 장기적 전략적 차원에서 핵심기술과 주요인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동맹이 중요하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중국과 교역을 대체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 신남방정책처럼 대체시장을 찾아야 한다.

기업생존 대책, 정부의 지원·협업 절실

정부는 최태원 회장이 21일 "중국시장을 포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며 "생존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한데 기업 혼자서 해결하라는 것은 말이 안되고 정부의 지원·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을 새겨들어야 한다.

최근 삼성전자가 RE100(신재생에너지 100% 사용) 가입을 선언했다. 글로벌 투자사와 경쟁사들의 RE100 가입 요구와 압박을 해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선택이다. 엄청난 신재생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정부는 마땅히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정책으로 RE100 가입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들을 지원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 전 정부의 태양광 비리를 때려잡겠다는 의지만 불사르고 있다. 지난 정부 허물을 들추는 일보다 기업 성장에 도움되는 전향적인 자세가 더 시급하다.

범현주 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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