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찬 가천대 겸임교수, 경제저널리즘 박사

때로는 열마디 말보다 사진 한장이 더 강한 인상을 풍긴다. 10월 25일 미국 조지아주 브라이언카운티에서 열린 현대차그룹 전기차공장 기공식 사진이 그랬다. 기공식에 미국 연방 상·하원의원 등 조지아주 정치인과 주지사, 백악관과 상무부 등 연방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차 조지아공장은 1183만㎡(약 358만평) 부지에 연간 30만대 양산 규모로 지어진다. 현대차의 투자액 55억4000만달러(약 7조9000억원)는 조지아주 역사상 최대다. 조지아 주지사는 현대차그룹이 일자리 8100개 이상을 만들 것으로 기대했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가 미국에서 잘 팔리고 러브콜을 받아 전기차 전용공장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두 회사의 전기차 전용공장이 없다. 내연기관차 생산라인에 전기차 전용 플랫폼(E-GMP)을 마련한 수준이다. 지난해 현대차 노사가 특별 합의를 통해 전기차 전용공장을 울산에 짓기로 했다. 조지아공장처럼 2023년 착공해 2025년 완공하는 일정이다.

글로벌 큰손과 기업들의 최근 행보는 전기차가 자동차산업과 세상을 바꿀 게임체인저임을 보여준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애플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대만 기업 폭스콘과 손잡고 전기차 생산에 뛰어들기로 했다. 일본 도요타는 기존 전기차 플랫폼을 접고 완전히 새롭게 구축하기로 했다.

세상 바꾸는 게임체인저, 전기차

사우디는 막대한 오일머니로 조성한 국부펀드를 산업정책에 활용하는 국가다. 이번 프로젝트는 석유의존도를 낮추고 산업구조를 다각화하기 위한 '비전 2030 경제전략'의 일환이다. 2040년께부터 글로벌 석유 수요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자 미래 먹거리 확보 차원에서 전기차와 배터리산업에 진출하는 것이다. 사우디는 광대한 사막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해 저렴한 비용으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환경도 조성해왔다.

폭스콘은 지난해 전기차 모델 3종을 내놓아 전기차 제조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들은 설계·개발과 생산을 분리하는 분업을 염두에 둔다. 독일 완성차 업체 BMW의 뼈대·부품을 쓰고, 폭스콘이 차량 내 인포테인먼트와 자율주행기술 관련 전기부품 개발을 맡는다. 2025년부터 시어(Ceer) 브랜드 전기차로 중동·북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내연기관차는 물론 하이브리드차 강자인 도요타는 전기차 전환에 굼떴다. 올해 초 뒤늦게 전기차 플랫폼(e-TNGA)을 구축하면서도 전기차 생산라인에서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도 제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러다 여기서 나온 첫 전기차 bZ4X가 주행 중 바퀴가 빠지는 결함으로 전량 환불사태를 빚었다.

이에 도요타는 e-TNGA를 폐기하고, 100% 전기차에 집중하는 플랫폼을 새로 구축하기로 했다. 거대하고 정밀한 틀로 차체 핵심부를 한번에 찍어내는 미국 테슬라의 기가플레스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새 플랫폼 개발에 2년이 걸리고, 신차 출시가 늦어지는 것을 감내하겠다는 각오다.

'석유 부자' 사우디의 전기차 생산, 도요타의 절치부심 전기차 리부팅으로 세계 전기차시장 경쟁은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현대차는 당초 내년 상반기로 예정했던 미국 조지아공장 기공식을 앞당겼다.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한해 보조금을 주는 인플레감축법(IRA) 리스크를 돌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일정보다 몇개월 앞서 기공식이 열려 신이 난다"면서도 조지아공장 완공까지 3년간 IRA 적용유예를 요청한 한국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

세계 자동차산업의 중심이 급속도로 전기차로 넘어가는데, 국내에 전기차 전용공장이 없다. 선두업체가 짓겠다는 공장은 한국보다 미국이 먼저다. 게다가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산업도 국내보다 해외생산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 전기차와 배터리산업에는 강점과 약점이 병존한다. 현대차그룹이 늦게나마 전기차 부문 투자를 확대하는 점과 차량 디스플레이·조명 등 전기차 부품 기업의 성장, 국내 배터리 산업이 현대차·기아에 종속되지 않고 세계시장을 무대로 뛰는 점 등은 강점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SW) 기술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폭스콘 같은 생산 전문기업이 없는 점, 새로운 기업이 전기차 산업에 등장하지 않는 점, 전기차산업이 도약하도록 정부가 전략적으로 시장을 제공하지 못하는 점 등은 약점이자 아쉬운 대목이다.

산업정책, 보다 대담하고 창의적이어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전 부처의 산업부화'를 주문했다. 민간이 더 잘 뛰도록 정부가 '더 좋은 유니폼과 운동화'를 공급하겠다고 했다. 무작정 유니폼과 운동화를 지급하며 뛰라고 하지 말고 선수의 강점과 약점부터 살피자. 중국의 전기차 부상을 미중간 분쟁이 일정 부분 가로막는 현 상황에서 한국의 전기차·반도체·배터리 산업정책이 보다 지혜롭고 대담하고 창의적이어야 미래가 보장된다.

양재찬 가천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