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 인천대 교수, 동북아국제통상학부

한러관계가 1990년 수교 이래 최악의 위기 상태다. 제재와 역제재가 맞서는 글로벌 패권경쟁의 늪에 빨려 들어가 허우적대고 있다. 연해주 한국기업 전용 공단 조성 등을 비롯해 유망한 경제협력사업들은 대부분 논의가 중단됐다. 지난해 대러 수출과 수입은 전년 대비 각각 36.6%, 14.7% 감소했다. 2009년부터 지속된 대러 무역수지도 적자폭이 전년보다 확대됐다. 교역통계 수치상의 감소만이 문제는 아니다. 자동차 전자 조선 등 주력 수출산업 모두 현지 공장 가동 중단, 수주계약 해지, 설비공급 차질 등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경제통상 부문에서 긍정적 측면도 관측되니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말자는 주장도 있다. 일부 기업은 중앙아시아를 우회하는 대안을 강구하고 있고, 또 다른 일부 기업은 서방이 떠난 러시아 시장을 공략할 적기라며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교역 감소 추세에서도 중고차 의료기기 식품 등의 수출이 늘었고, 러시아 OTT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 구매가 급증하는 긍정적 신호도 확인된다.

무엇보다 한국인·한국기업을 바라보는 러시아인의 태도가 아직은 호의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했지만 비자면제 협정은 연장되고 있다. 반도체 제조용 희귀가스 수출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 정책지도에서 사라진 유라시아

과거에도 위기는 있었다. 수차례 대내외 경제환경이 악화되면서 한러 경제관계가 급격하게 위축되었지만, 단기간의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강한 복원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가능성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필자의 속단일지 모르겠지만 상황이 예전 같지는 않다. 양국 모두 관계 개선의 의지가 약하고 미래 전망에 회의적이다. 일단 한국의 대외정책에서 유라시아는 사실상 방치된 상태다. 한마디로 유라시아가 한국의 정책지도에서 사라졌다. 산업부의 2023년 대통령 업무보고는 '시장별 수출시장 다변화'와 관련해 글로벌시장을 전략시장 주력시장 잠재시장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유라시아는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달 11일 외교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도 마찬가지다. 보고내용 중 핵심적인 동맹·주변국 외교 범주에서 러시아는 사라졌다. 그저 글로벌 가치·국익 외교와 관련된 지역별 협력 네트워크 심화를 언급하면서 러시아·중앙아시아를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대러 관계에서는 '국제규범에 기반한 한러관계의 안정적 관리'라고 적시했다. '윤석열정부 110대 국정과제' 문건 표현 그대로다.

중앙아시아는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다음의 마지막 순서에 배치하며 '한-중앙아 협력 포럼, 친선그룹 활동 등을 통해 우리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 확보 및 다층적 협력 심화'를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중앙아 정책이 대러 외교의 실종을 대체할 수준도 아니고, 전략적 가치나 의의가 격상되었다고 평가할 만한 어떠한 '변화'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억지로 구색을 맞춘 모양새다.

유라시아 외교의 실종은 지방정부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강원도는 재정효율화를 명분으로 이달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소재한 러시아본부의 폐쇄를 결정했다. 러시아와 강원도의 극동간 국제교류, 경제협력 등의 최전방 조직인 러시아본부의 한해 운영예산이 고작 2억6000만원이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지만, 2011년 무역사무소 개설 이후 지금껏 잘 키워온 조직을 폐쇄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 충격이 크다.

러-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극동과의 경제교류에 상당한 제약이 있고, 현지 투자 여건이 악화되어 폐쇄 결정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근시안적인 사고다. 전쟁 발발 후 중러 관계의 밀착과 중국의 극동 시장 침투가 강화되는 추세를 주목한다면 오히려 인력과 예산을 늘리고, 전후 '정상화' 국면을 대비하며 정교하게 사업을 설계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재정 건전성 확보' 그 너머의 전략적 구상에 미치지 못한 탓이다.

한국산 무기 우크라 우회 수출에 경고

러시아는 한국의 의도적인 '거리두기'에 대한 섭섭함을 직간접으로 표현해왔다. 지난해 10월 27일 푸틴 대통령의 발다이 국제토론클럽 연례회의 발언도 곱씹어보면 그런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발언 요지는 이렇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이 폴란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기로 한 것 같은데, 만일 러시아가 똑같이 북한과 협력관계를 개선한다면(즉, 무기공급을 한다면) 한국은 기분이 좋겠는가?" 한마디로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다.

그런데 지금처럼 양국관계가 방치된다면 미래는 결코 알 수 없다. 북중러-한미일 대립 구도의 재연 가능성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 10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관리들을 인용해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155㎜ 포탄 10만발을 구매한 뒤 우크라이나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내용은 미 국방부 대변인이 "우리는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탄약을 구하려 하고 있으며 북한은 비밀리에 이를 제공하려 한다고 평가한다"는 발언 뒤에 나왔다.

북러관계 전문가인 박종수 전 러시아공사는 '은밀한' 북러 무기거래 등 광범위한 군사협력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2000년 2월 갱신한 북러신조약이 이전과 달리 '자동군사개입'을 폐기하면서 '즉각 접촉'이라고 협력관계를 낮췄지만, 지금은 명분만 주어진다면 즉각적으로 군사협력을 강화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국제정세가 조성되었다. 최근 북러 국경철도 운행 재개를 예사롭게 봐서는 안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한편 러시아의 한반도 전문가인 콘스탄틴 아스몰로프 박사(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중국·현대아시아연구소)는 지난해 12월 말 '네오'지에 발표한 글에서 아직은 누구도 확증과 반론을 펼칠 수 없는 불확실한 '첩보'에 의존하고 있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부디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는 국내외 다양한 소식통을 인용하며 최근 WSJ의 무기 거래 관련 보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의 간접적인 무기 지원이 북러 군사협력에 맞대응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고, '한러관계의 간격을 더 벌려 반러 전선에 한국을 묶어두려는 미국의 책략'이라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 전문가들은 단순한 의혹을 넘어 한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이 거의 확실하다는 입장으로 기울고 있다. 러시아의 제재정책 전문가인 비탈리 소빈은 지난 10일 러시아외교협회(RIAC)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에서 캐나다와 폴란드가 구매하는 한국산 무기는 규모로 볼 때 그 일부가 십중팔구 우크라이나로 향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가능한 대응조치'라는 소절에서 한국산 무기 수출에 맞서는 러시아의 대북 지원 가능성을 상세하게 열거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 맺는다. "만일 한국산 무기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우크라이나군에 관여된다면, 모스크바에도 평양에 상당한 지원을 제공할 계기가 나타날 것이다." 러시아 정부의 공식 논평은 아니지만, 독립분석가의 입을 빌려 한국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위험한 게임' 한다고 판단

과거 러시아는 한국이 미국의 압박을 못 이겨 서방의 대러제재에 참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의 보수정부가 방산 수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위험한 게임'을 감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러관계는 지금 길을 잃었고, 그간 불신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위태롭다. 확증편향과 불신에서 출발한 보복적 대응조치가 상호 상승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디 한러 양국이 너무 멀어져 회복할 수 없는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양국에게 '헤어질 결심'은 그저 불온한 언어다.

성원용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