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

라스베이거스 가전박람회(CES)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테크놀로지 이벤트다. 초창기인 1970년대 CES는 이름 그대로 가전제품 쇼로 출발했지만, 21세기 IT기술 혁신을 타고 기라성 같은 글로벌 테크기업은 물론 스타트업들이 신기술과 신제품을 과시하는 기술 경연장으로 진화했다.

1월 초 열린 올해 CES 전야제 행사를 유튜브를 통해 일별하다가 눈길을 끄는 장면을 보았다. 삼성전자가 미세플라스틱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게 제작한 세탁기를 선보이는 미디어 행사였다. 삼성은 이 세탁기를 개발하면서 세계적 아웃도어 브랜드 기업 파타고니아(PATAGONIA)를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삼성이 파타고니아를 파트너로 선택한 점도 흥미롭지만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선 파타고니아 임원이 철학자라는 사실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파타고니아는 지구보호에 유별난 의무감을 갖고 있는 회사다. 만약 파타고니아의 지구보호 이미지를 삼성전자의 환경친화적 이미지 만들기에 이용하려는 것이라면 글로벌 회사의 전략으로서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다. 삼성전자는 정말 많은 에너지와 물을 쓰며 기후변화에 영향을 주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마음엔 없으면서 자연을 아끼는 척하는 행위, 즉 '그린워싱'을 넘어서는 성찰과 창의적 발상이 이뤄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지금 지구환경을 놓고 벌어지는 국제사회의 담론과 메가트렌드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을 삼성전자다.

세계적 기업들이 탄소중립이나 ESG 경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만약 그런 전략적 차원을 한발자국 넘어 고위 임원 누군가가 "지구가 정말 위험하구나"하는 마음이 생겨서 기후위기 대처에 삼성전자가 할 수 있는 일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나이브한 생각인가.

지구보호에 맞춘 파타고니아 경영철학

삼성전자에서 발상의 전환이 벌어졌으면 하는 생각은 파타고니아의 경영 행태를 보면서 생각해본 아이디어다. 기조 연설자로 나선 파타고니아 철학담당 임원 빈센트 스탠리는 "삼성전자와 함께 미세플라스틱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세탁기를 개발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고 입에 바른 듯한 연설을 했다. 스탠리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니 그는 오랫동안 파타고니아의 판매와 마케팅에 관여했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스탠리는 특이한 존재다. 공식 직함이 '철학 담당 임원'이다. 언론은 그를 '사내 철학자'(In-house Philosopher)라고 칭한다. 그는 돈버는 일에도 참여하지만 산문과 시를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1970년대 이본 쉬나드의 파타고니아 창업에 동참해 반세기 이상 같이 일했다. 쉬나드가 자랑하는 책 '책임있는 회사'(The Responsible Company)의 공저자가 바로 스탠리라는 사실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파타고니아가 환경가치를 경영 철학에 깔아놓은 것도 그의 공인 듯싶다. 사실 스탠리는 자연과 관련해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으며 '책임'이란 단어를 쓰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파타고니아는 노스페이스에 이어 미국에서 브랜드파워 2위의 아웃도어 패션기업이다. 기업가치가 30억달러이며 연간 순익이 1억달러를 넘는다. 그런데도 마케팅과 광고에서 물건을 팔지 못해 안달하는 세계적 의류기업들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1960년대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며 북한산 인수봉에 '취나드 길'를 개척한 암벽등반가다. 등산장비를 만들다가 아웃도어 의류에 손을 대 크게 히트했다. 그는 돈버는 사업이 원래 의도한 인생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신념으로 삼고 산다.

2002년부터 파타고니아 매출액의 1%를 풀뿌리 환경활동가들에게 기부해 오던 쉬나드는 지난해 여름 미국 기업계를 놀라게 하는 부의 사회환원을 단행했다. 그는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주주'(Earth is now our only shareholder)라는 공개편지를 통해 자신과 가족이 보유한 4조2000억원 규모의 회사 지분 100%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창립한 재단과 비영리 단체에 공짜로 넘겼다.

이제 그와 그의 가족은 주식을 돌려받지 못할 뿐 아니라 회사 이윤을 배당받지도 못한다. 미국은 부자가 많이 태어났고 돈 쓰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이본 쉬나드가 단행한 부의 사회환원 방식은 미국 자본주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행위로 평가받는다.

삼성전자가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삼성전자는 파타고니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 기업이다. 창업 배경과 가치 지향점이 다르고 기업 총수는 어쩌다 억만장자가 된 파타고니아 창업자와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파나고니아는 삼성전자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단순한 ESG경영 차원을 넘어 인류를 위해 어떤 가치있는 일을 창안해내고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다. 파타고니아가 삼성전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