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국민설득에 나섰다. 21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서다. 윤 대통령은 23분간 원고지 52매 분량의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윤석열정부 출범 후 최장시간 모두발언이다. 이 발언은 모두 TV로 생중계됐다. 원고도 당일 새벽까지 손수 고칠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했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얘기다.

이날 윤 대통령은 전체 연설의 80%를 한일문제에 할애했다. 그간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어왔다며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된다"고 했다. 처칠의 발언을 인용했고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소환했다. "현명한 우리 국민을 믿는다"며 감성에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남 탓'도 빠뜨리지 않았다. "전임 정부가 방치해, 양국 안보와 경제는 깊은 반목에 빠지고 말았다"고 했고, "대법원 강제징용 사건 판결이 일본의 수출규제 등 경제보복으로 이어졌다"며 대법원 판결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국민 자존심 상처낸 것 헤아리지 못하는 정권

지금 윤 대통령은 지지율 위기에 처했다. 일본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어떤 가시적인 상응조치도 얻어내지 못하면서 여론은 더 싸늘해졌다. 여기에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오락가락한 대응도 미움을 보탰다. 그 결과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지난해 12월 이후 3개월 만에 다시 60%를 넘어섰다.(한국갤럽 데일리오피니언) 윤 대통령이 최장시간의 모두발언 기록을 세우며 직접 다급하게 대국민설득에 나선 이유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여전히 왜 국민들이 화가 나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윤 대통령은 강제동원 해법을 포함한 대일본 관계 개선이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국민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지금 우리 국민의 일본에 대한 자존감은 일제강점기 이래 최고다. 일본이 우리보다 경제강국이고 소부장 등 강점도 많지만 여기에 꿀려 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우리 1인당 GDP는 1995년 일본의 1/3 수준에서 지금은 거의 따라붙었다. 구매력지수(PPP) 기준으로는 이미 추월했다. 소니신화도 삼성이 대체했다. 경제뿐만 아니다. K-팝으로 대표되는 문화영역에서도 일본을 앞질렀다. MZ세대의 일본에 대한 당당함은 윤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친일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감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윤석열정부는 이런 한국민의 자존감을 크게 훼손시켰다. 윤 대통령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고 했지만, 국민은 정부 스스로 무릎 꿇으며 모멸을 자초한 상황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다.

극작가이자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속물이란 모든 것의 가격은 알되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 윤석열정부 외교가 딱 그 꼴이다. 누가 내든지 피해자에게 돈만 주면 된다는 식의 '제3자 변제 방식'을 해답이라고 여기는 것은 돈만 알고 가치는 모르는 '속물적 발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재인정권을 비판하면서 똑같이 따라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그동안 윤석열정부는 틈만 나면 문재인정권이 북한에 다 내주고 선의에만 기댄다고 삿대질했는데 정작 자신들은 일본에 줄 것 다 주고 선의만 기대하는 게 아닌가.

한일 정상회담 후 대통령실의 대응은 국민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윤석열정부 해법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고 있었음에도 대통령실은 "묵었던 호텔의 모든 직원들이, 연도에 나와 있던 일본 주민들이, 공항 직원들이 박수를 보내줬다"며 "일본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자국민 자존감을 박살내놓고 일본인의 마음을 열었다고 좋아라하는 대통령실을 국민이 어떻게 보고 있을지 생각이나 해봤나 모르겠다.

국민에 대한 진짜 설득은 스스로의 반성에서 출발해야

윤 대통령이 공들여 대국민 설득에 나섰지만 이에 납득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윤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 부정평가는 이번의 '굴욕외교'나 '69시간 노동제'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중도층 이반을 의미하는 60%대 부정률은 윤 대통령 통치스타일에 대한 누적된 절망과 분노의 표출이라고 봐야 한다.

대통령실은 한일관계 정상화와 뒤이은 미국 국빈방문, G7 정상회의 참석 등 잇단 순방외교로 대통령 지지율을 40%대에 안착시킨다는 복안이지만 통치스타일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으면 그 목표는 불가능에 가깝다. 정말 국민을 설득하고 싶다면 자신을 돌아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왜 국민이 화를 내는지, 지금 국민이 어떤 심정인지를 헤아리지 못하면 설득노력이 오히려 국민의 부아를 돋울 수 있다.

남봉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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