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

팬덤정치가 연신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팬덤정치의 행태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급기야 팬덤정치는 한국 정치의 악질적 병폐의 하나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팬덤정치는 사라져야 할 현상인가? 일각에서 이야기하듯이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유권자는 선거 때 심판하면 최선인가? 요컨대 미국식 엘리트 정치가 최종 답일 수 있는가? 혹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미국 사회에서는 1%만 정치 바짝 차리고 살고 나머지는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적어도 20% 많게는 절반 이상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산다. 한국의 유권자는 자신이 직접 개입해 작용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팬덤정치는 유권자 정치 참여의 한 형태일 수 있다.

문제는 팬덤정치가 뿜어내는 극도의 부정적 이미지이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팬덤정치를 팬덤의 원천인 K-팝 팬덤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맹목적 개인 추종과 지지만 남은 팬덤정치

K-팝의 발전과 팬덤활동이 불가분의 관계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팬덤 성원들은 가수의 신도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종종 채찍을 휘두르는 엄한 부모 역할을 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은 팬들의 비판적 개입이 없다면 K-팝의 질은 장기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초기 국면에서는 부작용이 상당했다. 팬덤 간의 과잉경쟁이 서로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을 부추기기도 했다. 1990년대 H.O.T와 젝스키스 팬덤 사이의 엄청난 격돌은 여전히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날 K-팝 팬덤은 일정한 가치를 공유하는 성숙한 공동체로 자리잡았다. 가수의 이미지 상승을 목적으로 가치 기반의 사회활동을 병행하기도 한다. 가수가 부적절한 언행을 했을 때는 무조건 감싸주지 않는다. 팬과 가수는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동반성장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팬덤정치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팬덤정치를 지배하는 요소는 정치인 개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추종뿐이다. 팬덤정치는 맹목성에 이끌려 경쟁자 혹은 '적'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사를 양산해왔다. K-팝 팬덤처럼 가치공유를 바탕으로 한 동반성장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현상인데도 K-팝과 정치 분야의 팬덤은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팬덤정치의 문제를 지지자 탓으로만 돌리기 어려움을 말해 주는 지점이다.

문제의 본질을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 보자. 많은 논자가 한국 정치에서 시대의 좌표를 제시하고 국민을 그 방향으로 인도하는 '큰정치'가 실종되었음을 개탄해왔다. 군정 종식을 추구했던 김영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추구했던 김대중, 지역구도 타파 개혁정치를 추구했던 노무현의 큰정치를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파악한다. 큰정치가 실종하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함께 꿈꿀 수 있는 공동의 좌표 없이 어지럽게 배회하고 있다. 결과는 극도의 정치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나름 살인적 일정을 소화하며 뛰고 있는데 유권자들은 일은 하지 않고 놀고 있다고 혹평한다. 좌표를 제시하고 국민을 인도하는 정치 본연의 기능이 사라진 데 대한 냉혹한 평가일 수 있다. 맹목성의 지배를 받는 팬덤정치 또한 이 모든 상황이 빚어낸 결과물일 수 있다.

팬덤정치의 긍정성은 살리면서 부정성을 극복해가야 한다. 그 필수조건은 큰정치의 복원이다. 좌표가 분명할 때 지지자와 정치인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하는 동반성장 관계가 될 수 있다.

긍정성 살리려면 큰정치 복원해야

역사적 경계선에 문재인이 존재한다. 문재인은 2012, 2017년 대선 때의 로고 '사람이 먼저다'가 상당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자 취임과 함께 사람 중심 경제 구현을 내걸며 큰정치를 펼치겠다고 했다. 포용사회 선도국가 주창도 그 연장이었다. 하지만 콘텐츠 빈곤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7년 이후 최초로 5년 만에 정권을 내주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문재인이 멈추어 선 지점은 큰정치를 복원하는 새로운 출발 지점이 될 수 있다. 다가오는 총선 전에 지극히 원초적 수준에서라도 큰정치 복원 조짐이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