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악' 거센 저항에 물러서 … 야권 "진정한 입법 중단이면 대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우파 연정에서 추진해온 '사법 정비' 입법 절차를 연기하기로 했다고 27일(현지시간) 밝혔다. 개혁을 빌미로 사법부 무력화를 추진하다 국내의 거센 저항과 미국 등의 비판으로 역풍을 맞자 일단 한걸음 물러선 것이다.
27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추진하는 사법개혁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대들이 도로주변 기물을 모아 도로를 막고 항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TV로 생중계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야권과) 대화를 위해 타임아웃을 갖기로 했다. 국민 분열을 방지하고 폭넓은 합의를 이뤄내기 위해 사법 정비 입법안에 대한 2∼3차 독회는 의회 휴회 이후로 연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조치를 "내전을 피하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앞서 네타냐후와 면담한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 측은 입법 절차를 크네세트(의회) 다음 회기로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크네세트는 유대민족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명절인 유월절(4월 5∼22일)을 전후로 휴회하며 다음 회기는 5월 초에 시작한다.

네타냐후 총리는 "우리는 지금 위험한 갈림길에 서 있다"며 "위기 상황에서는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사법 정비 입법에 저항해온 야권을 겨냥해 "나라를 갈라놓는 소수의 극단주의자가 있다"며 "하지만 나는 나라를 갈라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야권 지도자인 야이르 라피드 전 총리는 "만약 입법이 진짜로 그리고 완전히 중단된다면 우리는 진짜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러나 과거 (네타냐후의 거짓말을) 경험한 적이 있는 만큼 이번에도 그의 말에 속임수가 없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어제 네타냐후가 측근들에게 진정한 입법 중단은 아니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접했다"며 의구심을 숨기지 않았다.

야당인 국가통합당 대표인 베니 간츠 전 국방부 장관은 "안하는 것보다는 늦은 게 낫다"며 협상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야간 대화를 통한 해결을 촉구해온 이츠하크 헤르초크 대통령은 입법 중단 결정을 환영하면서 "최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필요하다. 모두가 책임감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당인 리쿠르당 소속으로 사법정비 입법에 반기를 들었다가 해임된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부 장관은 대화를 위한 입법 절차 중단을 환영했다.

미국 백악관은 환영의 뜻을 밝히며 국민 의사를 존중할 것을 강조했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번 연기 발표는 타협을 위한 추가적인 시간과 공간을 만들 기회로 환영한다"며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조속히 타협안을 찾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재집권한 네타냐후 총리 주도의 우파 연정은 사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입법을 추진해왔다. 연성헌법인 '기본법'에 반하는 의회의 입법을 대법원이 사법심사를 통해 막지 못하도록 하고, 여당이 법관 인사를 담당하는 법관 선정 위원회를 조종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입법의 초점이 맞춰졌다.

야당과 법조계, 시민단체 등이 이를 '사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12주 연속 대규모 반대 시위를 이어왔다.

특히 군 전력의 한축을 이루는 예비역 군인들이 야권의 뜻에 동조해 잇따라 훈련 불참을 선언하고 복부 거부 움직임까지 보였다. 예비군의 복부 거부 움직임으로 안보 위기 상황이 우려되자 갈란트 국방부 장관이 안보 상황이 심각해졌다며 공개적으로 사법 정비 입법 중단을 촉구했고, 네타냐후 총리는 하루만인 26일 갈란트 장관을 전격 해임하면서 시민들의 저항에 기름을 부었다. 수십만명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등 주요 도시에서 도로를 마비시키고 경찰과 충돌하며 이틀간 강력한 시위를 이어갔다. 전체 인구의 10% 가까운 80만명의 회원을 둔 최대 노동단체인 히스트라두트(이스라엘 노동자 총연맹)도 총파업에 나서 관문인 벤구리온 국제공항은 물론 쇼핑몰 등 주요 산업시설 등이 마비됐다.

이스라엘 의사 연합도 사법 정비 입법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28일부터 의료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압박했다.

한편, 히스트라두트는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정비 입법 연기 발표 후 총파업을 철회했으며, 이후 벤구리온 공항의 항공기 운항도 정상화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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