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규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

양곡관리법이 야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했으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민주당은 거부권이 행사될 경우 법안을 재발의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논란은 더 커질 모양이다. 또 4월 임시국회 본회의에서는 방송법 개정안이 상정될 예정이며, 이 또한 야당 단독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크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정부가 쌀 초과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해 쌀 가격을 지탱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쟁점이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인다. 이에 반해 방송법 개정안은 재원확보문제, 지배구조(이사회 구성)문제, 민영화문제 등이 얽혀 있어 상대적으로 복잡한 것 같다.

그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주제는 KBS 수신료 인상 문제다. 민주당은 43년째 동결된 수신료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에 따르면 '수수료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광고유치에 더 나설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방송내용이 선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 공영성이 떨어진다'라는 취지다. 즉 정부지원금이나 광고수입에 의존하는 현재 상태는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부와 여당은 수신료 폐지를 주장하는 여론을 내세워 TV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분리해서 납부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수신료 강제징수제도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두 법 개정안, 수요자 아닌 공급자 관점

양곡법 논란과 KBS 수신료 문제는 쟁점의 구도가 닮은 꼴이다. 우선 야당이 주도하는 두 개정안은 모두 공급자 관점에 서 있다. 이미 소비자는 쌀 수요의 감소와 공영방송 시청률의 감소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결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무시한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이 왜 그런 결정을 하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텐데 그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이 첫번째 닮은 점이다.

소비자의 관점이 없다는 것은 쌀시장과 방송시장이 공급자 주도 시장에서 수요자 주도 시장으로 구조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쌀농사를 짓는 고령농민의 농가소득을 보전해 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호소할 뿐이다. 가장 기본적인 농업보호의 논리 즉, 농업이 갖고 있는 공공적 성격에 대한 논리조차 흐지부지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에 2019년 10월 25일 "향후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 개발도상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는 홍남기 당시 경제부총리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총리의 말에는 약간의 유보가 숨어 있기는 했지만, 내외신은 앞다투어 한국이 WTO내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은 낮은 식량자급률 등을 근거로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농업 분야에 한해 개발도상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특별 품목과 민감 품목에 대해 관세 및 이행 기간 등에서 전체 17% 이상에 대해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선진국 지위가 되면 전체 농산물의 4%만 고율관세와 농업보조금으로 보호받는 민감 품목으로 지정할 수 있고, 그 외에서는 관세를 인하해야 한다. 만약 쌀이 '선진국 일반품목'으로 전환된다면 수입쌀에 최대 513%까지 적용되던 관세가 154%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당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비할 수 있다고 했던 부총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작년 말 발표된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식량자급률은 역대 최저에 이를 만큼 농업의 위기는 더 심화됐다. 농업 종사자의 고령화는 치명적 노동력 부족마저 초래했다. 한국 농업의 비전을 만들고 실행할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낼 때 '농업=쌀농사'의 시대는 훌쩍 지나가 버렸다.

소비자와 납세자는 묻는다. 농업이 쌀농사와 같은 말이 아닌데 왜 쌀에만 513% 관세를 부담해야 하는지. 부담을 감수하면 한국 농업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한국이라는 좁은 세상의 밖에서는 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AI), 자율주행과 드론 기술의 적용으로 미국의 한 농업 비영리단체(FFA)의 말을 빌면 '가장 오래된 산업에서 가장 혁신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농업과 공영방송 혁신 호기 놓치지 말길

민주당이 시청자에게 50년 전통이 사라져서는 안되지 않겠느냐고 읍소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공영성 개념도 바뀌었고, 방송 등 언론매체의 환경도 천지개벽했다. 이제 소비자는 원하는 콘텐츠를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찾아보는 시대다. 그 변화를 보지 않은 채 '현재의 KBS 수입구조로는 현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논리로는 설득력이 없다.

산업의 판이 바뀌었다. '농업=쌀농사' '방송=공영방송'의 낡은 사고에 기반한 현상유지 전략에서 벗어나 한국농업과 공영방송을 재탄생시킬 혁신의 호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필자만의 바람은 아니지 싶다. 여당 책임이 더 크다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없다. 73세에 이른 미국의 한 하원의원이 AI를 공부하러 50년 만에 대학에 다시 등록했다는 소식은 이 바람을 더 간절하게 만든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