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번역가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도청해온 사실이 지난 주말부터 미 언론보도로 드러났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은 이 정보의 출처가 '신호 정보보고(시긴트, signals intelligence report)'라고 표시했다. 이는 한국정부 내부 논의를 감청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실이 "한미동맹을 흔들만한 사안은 아니다"라고 서둘러 선을 긋는다. 이에 대해 미국의 잘못을 감싸고 있다고 해서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악재라는 분석도 나온다.

야당은 북한무인기 접근에 이어서 도청 정황까지 나왔는데도 용산청사가 청와대보다 보안이 튼튼하다는 정부주장에 대한 역공을 편다. 대통령실은 야당의 터무니없는 허위선동이라며 '자해행위' '국익침해'라고 반격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부여당과 야당의 이런 극단적인 설전은 전혀 불필요하며 부적절하다. 외부 정보기관 도감청의 본질을 무시한 국내 정치용 대응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일정을 앞두고 미국에 '예의있게' 대하기 위해서 도청과 감청에 항의하지 않는다면 저자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일부 불법활동 포함해서) 자기들 할 일을 하는 거고 우리는 주권국가로서 우리의 항의와 재발방지 요구를 하면 된다. 항의한다고 해서 공식 외교절차에 문제가 생길 수는 없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어제(11일) 이종섭 국방부장관에게 먼저 통화를 요청해서 최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을 도청한 내용을 포함한 미국의 군사기밀 누출 언론보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정부에 대해 긴밀히 소통하고 전적으로 협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도감청에 대해 인정한 거나 같다. 미국의 사실관계 조사란 도감청 정보 유출자에 대한 조사일 가능성이 높다. 두 장관은 한미동맹의 결속력이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며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계획된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강조했다.

국방·외교상 도청묵인이 '자해행위'

NYT가 입수해 보도한 문건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포탄을 우회 공급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논의했다. 한국 참모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윤 대통령에게 포탄을 공급하라는 압력을 가할 가능성을 놓고 우려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런 대화가 전세계에 폭로되었는데도 '가만히 있기'란 정말 비정상적인 대응이다.

1970년대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국장과 1989~1993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96)의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 2014)에는 그가 박정희정부의 김대중 납치사건과 전두환정권의 김대중사형선고로부터 두번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목숨을 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1970년대 주한 미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가 자신에게 시국사건 불개입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도쿄 호텔에서 납치된 DJ가 행방불명이다. 하루 안에 위치를 알아내고 구출방법을 내놓으라"고 명령한 얘기를 썼다. 그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서 오키나와 근해에서 선박위에 눈을 가린 채 결박하고 바다에 던지기 직전이라고 다음날 보고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성질과 자존심을 잘 알기에 맞대면을 피하고 긴급전화로 "그를 처형하면 미국과의 관계는 끝이 날 우려가 있다"며 구해주라고 호소했다. 결국 DJ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동교동 자택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박정희는 "정부 내에서 제멋대로 불한당 같은 짓을 하는 부류들의 비열한 음모로부터 내가 신속하게 개입해 정적을 구해냈다"는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미국은 그 설화를 유지시켰고 "아시아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의 체면을 살리는 게 최우선이다"라고 그레그 전 대사는 회고했다.

하지만 단 하루만에 DJ의 해상위치를 알아낸 CIA의 작동이 행간에서 읽힌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발휘되는 미 첩보당국의 정보력이자 업무의 일환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일단 항의와 재발방지 요구가 먼저

이번에 유출된 정보문건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는 2016년 2월 미 국가안전보장국(NSA)의 고위인사 도청 문건을 공개하면서 2008년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메르켈 독일총리의 기후변화 회동내용, 유럽연합과 일본 장관들의 세계무역기구(WTO) 관련 논의 등 수많은 도청자료도 공개했다.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은 미 정보기관의 이같은 도감청을 폐지하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한 셈이어서, 이번 기밀문건 유출로 우방국들의 신뢰저하는 피할 수 없게 됐다고 외신들은 보도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70년 동맹국이니 다 괜찮다고 믿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하나. 가짜뉴스라는 주장보다는 일단 항의와 재발방지 약속, 사과의 과정이 먼저다. 그래야 외교와 국방에도 실익이 있고 대통령실 이전을 두고 일어난 국민의 불안과 의혹도 다소 해소될 것이다.

차미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