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한다. 도전의 형태는 여럿이다. 환경 변화나 총칼을 앞세운 전쟁이 대표적이다. 타락한 문화와 낯선 질병도 있다.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문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를 통해 깨달은 이치다.

범위를 좁혀 국가나 사회에 적용해도 된다. 더 좁혀 조직이나 개인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사도 개인의 삶도 시련과 극복의 연속이 아니던가. 수많은 도전을 물리친 모멘텀은 '기억'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도 기억이 생멸의 열쇠임을 알려 준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망각과 기억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부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를 향해 외친다. "모든 그리스 역사가의 눈과 혀를 뽑아 역사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징기스칸도 그랬다. 자신의 사신을 죽인 호라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불태웠다. 대대적 살육과 동화작업으로 과거를 기억할 민족집단을 아예 해체했다. 기억의 상실, 즉 역사에서 잊힌 문명과 민족이 가장 비참하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는 평온한 삶과 영웅적인 죽음을 두고 후자를 선택한다. 후세에 영원히 기억되기 위해서다.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에서 '워 보이'들도 죽음을 앞두고 "기억해줘"라고 외친다. 사실 원문은 "증언해줘(Witness)"이다. 죽어 발할라(천국)로 갈 때 자신의 용맹함을 증언해 달라는 거다. 기억과 증언은 이 장면에서 이음동의어가 된다.

트라우마 해소 위한 공감 노력은 했나

기억은 이처럼 민족과 문명의 존립 근거가 된다. 사회와 조직에게는 정체성의 바탕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적 자부심을 현시하는 것도, 전쟁과 참사를 기념하는 것도 공동체로서 집단기억 투쟁의 일환이겠다.

몰론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많은 기념비와 잦은 기념식을 경계한다. "희생을 숭고한 것으로 미화하고 거짓 위안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진정한 애도라면 상처를 그대로 열어 두라는 거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코넬대 명예교수 도미니크 라카프라는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성찰은 공감(empathy)"이라고 짚었다. 공감을 통해 굴곡진 과거와 희생자를 진정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념비나 기념행사만으로는 자칫 꼭 치유해야 할 사회적 트라우마가 대상화 객관화에 머물 수 있다. 돌이나 현수막이 아니라 뼈에 새기고 가슴으로 끌어안을 때 비로소 집단기억은 제대로 전승될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도 그렇다. 과연 우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 17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도 추모식에 참석했다. 이런 행위들이 그저 대상화에 머무르지 않도록 내재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을 담는 것도 기억과 전승의 한 방식이겠다.

토인비는 "민주주의는 인도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극한 노동에 내몰린 건설노동자들의 절규는 경제적 반민주주의의 단면 아닌가. 일본강점기 징용공과 위안부의 요구에 인도주의적 처리를 거부한 한일 양국 조치는 국제인권적 반민주주의 아닌가. 서울시의회가 세월호 기억공간 철거에 나서고 서울시가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 2900만원의 변상금을 부과한 것이 인도주의에 맞나.

비극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물론 동시대인이나 후세대에게도 사회적 상흔이 되어 트라우마로 남는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태에 책임이 있는 측은 기억을 왜곡하거나 지우려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서울시 서울시의회는 과연 트라우마 해소를 위해 얼마나 공감 노력을 했는지 의문이다.

일본도 원폭과 원전을 두고 기억의 줄타기를 벌인다. 19일 G7을 히로시마에서 열면서 원폭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전쟁 가해자임은 흐릿하게 하면서. 아마도 징용공을 노무자로 부르거나 위안부의 인도주의적 요구를 외면하는 것도 전쟁범죄자임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억조작의 일환이겠다. 반면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는 안전하다며 바다에 방류하려 한다. 자신들이 농업용수로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율배반적 기억 프로파간다 아닌가.

조작과 지우기에 맞서 기억해야 할 것들

토인비는 문명 쇠퇴의 징후를 지도자들의 도취에서 찾았다. 자신이 추종자를 유도했던 최면술에 스스로 빠지는 상황이다. 이 경우 문명의 발육이 정지된다. 그러다 지도력을 잃으면 권력을 남용하는데, 이때 "병사는 반항하고 장교는 힘으로 질서를 잡으려 한다"고 했다. 큰 혼란이 벌어지고 문명은 바야흐로 해체 단계에 접어든다. 그 형태는 지배적 소수로부터 대중의 이탈로 나타난다고 했다. 지구상 수많은 문명이 이렇게 사라졌다고 했다.

기억하자. 자랑도 부끄러움도 기쁨도 슬픔도 함께 기억하자. 조작과 지우기에 맞서, 흐르는 세월에 맞서 제대로 기억하자.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