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 몸을 불살라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

지난 9월 긴급조치 4호(민청학련 사건)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이례적으로 무죄를 구형한 임은정 검사의 심경이다. 재판부도 무죄를 선고했다.

임 검사의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새누리당이 박근혜 당선인이 내세운 국민대통합을 위해 '유신헌법 긴급조치로 인한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을 올해 안에 처리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법은 박 당선인이 의원시절 마지막으로 발의한 법이기도 하다.

유신독재를 이끌어온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불행한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충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신독재체제를 지탱해온 긴급조치는 6년여 동안 지속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2000명에 달하는 구속자를 낳았다.

이 법안의 취지는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부당한 피해를 회복하며 미래적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골자는 심의위원회에서 피해사례를 접수하고 심의해 피해자를 선정한 뒤 보상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특별사면과 복권, 전과기록 말소, 복직 복학 등을 가능케 하고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과 내용으로는 입법취지를 이루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정설이다.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확정하거나 무효화시키지 않은 과거사청산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법원에서 긴급조치 위법성 인정

심사를 통해 일부에게 지급하는 몇 천만원으로는 피해회복도 어렵다. 게다가 긴급조치 보상법은 '위헌'이라는 주장마저 나온다.

긴급조치 자체가 범죄이기 때문에 '보상'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다.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배상, 적법행위는 보상을 해준다. 따라서 '보상법'이란 긴급조치가 적법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헌재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법원은 이미 긴급조치의 위법성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2010년 12월 "긴급조치 1호는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어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의 근거였던 긴급조치 4호에 대해서도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2월 "국가적 안위에 중대한 위협 우려가 있다고 볼 수 없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밝혔다. 서울 북부지법은 지난 8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피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긴급조치 피해자 250여명이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이 중 24명에 대한 재심이 진행 중이며 속속 무죄가 선고되고 있다. 피해자들에게는 보상이 아닌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긴급조치 보상법과 관계없이 당당하게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배상법에 따라 배상받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국가가 선심을 쓰는 듯한 특별법에 의해 심사를 통해 보상받는 것은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자신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아니라 명예훼손이기 때문이다.

돈 몇푼 주는 것으로 마무리 안돼

대표적 긴급조치 피해자 모임인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가 이 법의 철회를 요구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피해자'라는 용어로 민주화운동 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이들에 대한 예우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특히 소액의 생활지원금을 핑계로 현재 진행 중인 재심이나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소송을 지연시킬 우려가 크다는 점이 지적됐다. 피해 당사자들이 반발하는 마당에 국민화합은커녕 오히려 갈등만 초래할 수도 있다,

진전한 대통합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임 검사의 무죄 이유에도 나와 있듯이 이들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예우하여 명예와 피해를 회복시켜 불행한 과거사를 청산하는 데 있다.

김주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