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채씨 후손, 나주정신 재정립 필요

고모할머니 박기옥씨 정부포상 못받아

"저희 고모할머니처럼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들이 이름이라도 남길 수 있도록 학적부나 다른 기록들을 꼭 찾아야 합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박경중(71·사진) 이사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킨 '나주역사건' 주인공 독립운동가 박준채 선생의 후손이다. 박준채씨는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 학생에게 댕기머리를 잡힌 박기옥씨의 사촌동생이다. 따라서 박 이사가 말한 고모할머니는 박기옥씨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그의 집안에는 일제 때 나주지역 사회 및 청년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 많았다. 박준채씨의 형인 박준삼씨는 나주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가까운 인척인 박공근씨는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을 각각 맡았다. 나주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았던 박동희씨 역시 같은 집안이다.

이 분들 중에 박준채·박공근·박동희씨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당연히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박기옥씨는 아직도 미서훈자로 남아 있다.

그동안 후손들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녀가 34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항일운동을 입증할 자료 등이 부족해 번번이 무산됐다. 그녀는 독립유공자 집안이라는 화려한 명예 뒤편에 드리워진 그늘처럼 남아 있다. 박 이사는 "지난해에도 고모할머니에 대해 추가 서훈을 추진했는데 무산되는 바람에 많이 분들이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착잡한 심경을 얘기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생가로 이어졌다. 박 이사가 살고 있는 고택은 박준채씨와 박기옥씨가 당시 살면서 광주로 통학했던 곳이다. 이 집은 1910년쯤에 지어졌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집안 곳곳에 박준채 선생의 사진 등 유품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인터뷰 역시 박준채 선생이 공부했던 사랑채에서 진행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찾는 방문객은 모두 이곳을 찾는다. 방문객 때문에 고택이 항상 말끔하게 정리돼 있다. 그에게 고택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지키고 보존하는 개념이 아니다"면서 "7대가 살았던 이 집에 살면서 정신을 지키고 실천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말을 아꼈다.

독립유공자 자손답게 그는 나주학생독립운동의 재정립을 강조했다.

나주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 때 동학군과 관군이 읍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고, 이듬해 단발령에 저항해 의병이 일어난 지역이다. 또 드넓은 평야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그만큼 식민지 착취가 심했던 곳이다. 박 이사는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 또한 남달리 강해 나주역 사건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런 역사의식은 그의 삶에도 녹아들었다. 박 이사는 나주학생독립운동 재정립을 위해 나주문화원장과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았다. 해마다 10월 30일이면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식 준비에 한창이다. 박 이사는 "나주는 남도의 중심축"이라며 "나주의 정체성과 나주학생독립운동을 재정립하는 게 후손인 제가 남은 생을 다 바쳐 할일이고 인터뷰에 응한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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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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