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시위에 2만여명 참가

처음부터 남녀연합시위 형태

사회·청년단체 지원활동 역할

내년이면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이다. 이 운동은 광주에서 촉발된 1929년 11월부터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을 통칭한다.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내일신문은 학생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록한다. <편집자 주>


광주에서 촉발된 학생독립운동은 서울을 전환점으로 전국으로 번졌다. 서울학생독립운동은 1~2차 시위에 무려 2만여명이 참여했고 처음부터 남녀 연합시위로 전개됐다는 점이 눈에 띈다. 사람을 파견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서울 학생들에게 전파하는 등 사회·청년단체들의 지원활동도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청년대중의 궐기' 호소 격문 = 서울지역 학생독립운동은 1~2차 시위에 무려 38개 학교 2만여명이 참여, 대규모로 전개됐다. 1929년 12월 5일부터 16일까지 이어진 1차 시위에는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보통학교를 포함해 각종 학교까지 모두 30개교가 동참했다. 이 기간동안 학생 1만2000여명이 시위 또는 맹휴를 전개했다.

일제는 여학생과 여성단체 주도로 2차 서울시위가 일어나자 여학교를 중심으로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사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공


1929년 12월 2일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서울지역 중등학교 등에 '조선 청년대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이 뿌려진 게 시발이었다. 긴장한 일제는 곧바로 모든 학교를 감시하고 이틀만에 120여명을 잡아들였지만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감행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시작으로 서울 학교 곳곳에서 동맹휴업이 이어졌다. 12월 6일에는 중동학교에서, 다음날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연행된 학생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생 36일째인 12월 9일. 경신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등이 일본 경찰을 뚫고 서울 한복판에 진출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 28일자 호외를 보면 2일부터 13일까지 시위·맹휴로 학생 1400여명이 검거됐다. 일제는 격문 배포와 시위 혐의로 45명을 구속하고 35명을 재판에 부쳤다.

1차 시위 이후 각 학교가 휴교하면서 학생독립운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학생들 열기도 높아졌다. 1930년 1월 6일 중동학교를 시작으로 개학을 하자 등교 거부로 항거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숙명여고보 등 19개 학교에서 1695명이 등교 거부에 동참했다. 연기된 학기말 시험 때 백지 답안을 내는 학생도 많았다.

이화여고보 최복순 학생과 근우회 허정숙 등이 만나 2차 시위를 준비했다. 1차 시위를 주도했던 남학생과 조선청년총동맹, 민중대회를 준비했던 신간회 핵심인물 상당수가 검거된 반면 다행히 여학생과 여성단체 역량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경성여자상업학교와 동덕여고보 숙명여고보 학생 16명이 1월 15일 오전 9시 30분 일제히 만세시위를 열기로 결정하고, 격문과 태극기 등을 준비했다. 일제가 첩보를 입수하고 순사교습소생 300여명까지 동원해 철통같은 경계를 섰지만 서울시내 18개 학교 7000여명이 일제히 시위를 시작했다. 일제는 소방차와 버스까지 동원해 학생들을 무작위 검거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이때 검거된 학생이 300여명에 달한다. 교육관청에 의해 퇴학과 무기정학 등 징계를 받은 학생도 380여명이다.


◆보도통제 뚫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전파 = 서울지역 학생독립운동은 처음부터 연합시위로 전개됐다. 1929년 11월 30일 경신학교 중앙고보 휘문고보 제1고보 제2고보 보성고보 중동학교 등이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대표들은 이날 각 학교 사정에 따라 시위를 일으킨 후 연합해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경성종로경찰서 '신용우 신문조서')

2차 시위는 1차 시위에 소극적이었던 이화여고보 여학생들이 먼저 논의를 시작했다. 1차 시위 당시 조기 방학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터다. 남학생들도 휘문고보 5학년생을 중심으로 2차 시위를 추진, 중앙고보 보성고보 배제고보 경신학교 학생들과 연락해 연합시위를 추진했고 이화여고보와 남녀연합시위를 계획했다.

서울지역 학생독립운동이 연합시위 형태로 벌어진 것은 사회·청년단체 지원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1929년 11월 12일 광주 2차 시위 이후 조선총독부가 보도통제를 실시, 다른 지역에서 정확한 진상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청년단체들이 광주에 사람을 파견해 학생독립운동을 서울에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중앙청년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와 같은 청년·학생단체뿐 아니라 신간회 근우회같은 민족계열 사회단체 역할도 컸다. 이들은 1929년 11월 중순 학생들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어 남녀 학교에 뿌렸다. 특히 신간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까지 계획했지만 무산됐다. 근우회는 여학생들과 연계, 이화여고보 숙명여고보 배화여고보 정신여학교 등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성민 박사는 저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서 "1차 시위운동 준비자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며 "운동방식 역시 대규모 시위로 전개돼 식민통치에 직접적으로 항쟁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서울 학생독립운동 성격을 분석했다. 윤준식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부회장은 "서울은 유족회조차 없을 정도로 학생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이 안되고 있다"며 "특히 당시 참여했던 여학생들이 추가 서훈을 받도록 발굴·조사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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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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