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항 해석 애매해 결국 금통위 재량 … '영리기업 여신지원' 조항 완화했지만 한은 소극적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코로나19 사태로 대대적인 양적완화를 하고 있지만 한국은행(한은)은 왜 안할까. 시장의 관심은 한은 역시 다른 주요국 중앙은행처럼 시장에 직접 개입할지 여부다.

한은은 현행 한국은행법(한은법)을 이유로 직접 개입에 방어적인 입장이다. 기업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할 법적 근거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법학자들은 한은법의 해당 조항이 애매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결정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정책적 판단 사항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리스크 없는 유가증권만 인수 가능? = 26일 금융권과 법조계에 따르면 한은의 회사채 매입과 관련해 한은법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조항은 68조다. 68조1항은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하는 바에 따라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계산으로 △국채 △원리금 상환을 정부가 보증한 유가증권 △그 밖에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 유가증권증권을 공개시장에서 매매하거나 대차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다만 2항에 '유가증권은 자유롭게 유통되고 발행조건이 완전히 이행되고 있는 것으로 한정한다'는 단서조항을 붙이고 있다.

한은은 해당 단서조항을 '리스크가 전혀 없는 유가증권'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신용등급이 가장 높은 AAA등급의 회사채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한은에서는 매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서조항의 '발행조건이 완전히 이행되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자체가 애매하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 여러 차례 회사채를 발행했고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는 회사채라면 '완전히 이행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발행조건을 이행하지 못했던 적'이 있는 회사채에 대해서만 매입을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순섭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 한국은행법학회 회장)는 "68조2항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금통위가 재량권을 갖고 정책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금통위가 회사채와 CP매입이 가능하다고 결정하면 현행법으로도 한은이 직접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68조를 '리스크가 전혀 없는 유가증권'에 대한 지원으로만 한정할 경우 굳이 76조를 별도로 둘 이유도 없다. 한은법 76조(정부보증채권의 직접인수)는 '한국은행은 원리금 상환에 대하여 정부가 보증한 채권을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정부 보증' 자체가 '리스크가 없는 것'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여신 지원 기능' 확대한 법조항 = 금융당국 관계자는 "2011년 한은법 80조를 개정하면서 한은이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대했다"며 "법조항까지 개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장에 융단폭격이 내리는 상황에서 자기들만 살려고 별도의 공간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은법 80조는 '금융기관의 신용공여가 크게 위축되는 등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 위원 4명 이상의 찬성으로 금융기관이 아닌 자로서 금융업을 하는 자 등 영리기업에 여신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자금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한은이 개입할 수 있는 충분한 법적 근거가 된다. 2011년 이전 법조항에 명시된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라는 문구를 보다 완화한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어려움을 겪었던 종금사에 지원한 적이 있을 뿐 해당 법조항이 일반 회사를 상대로 여신을 지원하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금융업을 하는 제2금융권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근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당 조항의 지원대상을 금융업으로 국한해서 해석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법조항이 애매하기 때문에 개정을 통해 법을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은 관계자는 "미 연준도 재무부의 보증을 통해 양적 완화를 시행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정부의 보증이 있다면 한은법 76조에 따라 지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통위원, 손해배상 조항이 걸림돌" = 한은의 유가증권 매입이나 영리기업 지원의 결정권은 법적으로 금통위원들에게 있다. 금통위원들이 결정을 내리면 지원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손해배상조항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한은법 25조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해 한국은행에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해당 회의에 출석한 모든 위원은 한국은행에 대해 연대해 손해배상책임을 진다. 다만, 그 회의에서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시한 위원은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돼 있다.

정 교수는 "한은이 직접 지원에 나섰다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 부실이 커지는 등 책임 문제가 불거지면 금통위원들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며 "개별 법조항에서 지원이 가능하다고 해도 금통위원들에 대한 손해배상조항이 있는 한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연방법에 정책적 판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이 있고, 일본 중앙은행은 재무대신 및 내각총리 대신의 인가를 받은 때에는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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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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