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 집중될수록 팬데믹에 타격 커

작게 나누고 자족성·연결성 갖춰야

코로나19는 성장과 개발의 상징인 현대 대도시들에 치명타를 안겼다. 밀집된 인구는 바이러스 확산에 최적화됐고 업무와 유흥 중심으로 짜여진 도시 공간에는 안전과 이를 뒷받침할 의료 시스템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팬데믹이 일상화되면 지금의 도시 구조가 지속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역사적 사건, 도시공간 뒤바꿔 =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은 기존 공간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력의 등장은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는 계기가 됐다. 인구집중으로 도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중심이 됐지만 급격한 도시화는 과밀로 인한 사회문제, 환경오염, 전염병 확산 등 부작용을 맞이했고 19세기 후반 쾌적한 주거환경을 강조하는 근대도시 계획이 태동했다. 도로와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이 설치됐고 채광, 통풍, 환기 등이 강조됐다.


끝없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현대도시가 전환기를 맞은 것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겪으면서다. 20세기 후반 기술 발전과 고속 성장의 부작용이 전 세계 도시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과거와 다른 위기 징후가 도처에서 번졌다.

서울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위험사회 징후가 나타났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우면산 산사태, 강남역 일대 침수, 땅꺼짐 등 각종 도시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울이 버틸 수 있던 힘 '공간' =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터지고난 뒤 가장 두드러진 세계적 도시들의 취약점은 단핵 구조라고 지적한다. 각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였던 곳들이 막히자 도시 기능 전체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 프랑스 파리 상제리제 거리 등이다. 팬데믹 상황으로 중심부에 대한 통제가 이뤄지자 교통, 도시 기능, 행정, 의료 모든 것이 문제가 됐다.

반면 서울은 천만 인구를 가진 도시로는 거의 유일하게 코로나19를 지혜롭게 헤쳐나갔다. 촘촘한 안전체계, 발빠른 리더십, 우수한 공공의료 체계 등이 코로나 극복 동력으로 꼽히지만 공간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마치 팬데믹 상황을 예견한 듯 다핵·다중심 구조로 재편된 서울의 공간 구조가 감염병과 싸움을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서울은 감염병 관리를 위한 거점병원과 선별진료소 등 공공보건의료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작동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급증한 온라인쇼핑과 택배 업무에 대응할 수 있는 물류체계도 잘 구축돼 있다. 배송 물량이 30% 이상 늘었지만 스마트 물류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했다. 서울의 공원녹지 시설은 시민의 야외 활동공간으로 제 역할을 했다. 내·외사산, 도시공원, 수변공간 등은 거리두기와 시설 운영 제한 와중에 이용률이 51%나 증가했다. 특히 버스와 도시철도 등 대중교통이 중단없이 운영됐다. 따릉이·나눔카·1인전동차(Personal Mobility) 등 다양한 도시교통 수단이 대중교통을 보완하며 서울의 도시활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효한 것은 중심이 분산된 서울의 공간 구조다. 김인희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연구실장에 따르면 서울시는 2014년 수립된 2030서울플랜을 통해 중심지 체계를 1도심 5부도심 구조에서 3도심 7광역중심의 다핵·연계형 공간구조로 재편했다. 글로벌경쟁력 강화를 위해 역사문화중심(한양도성), 국제금융중심(여의도·영등포), 국제업무중심(강남) 등 3도심을 지정하고 서울의 공간적 범위가 확대되는데 대응해 7개 광역중심지를 지정, 일자리와 지역별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심지 기능을 부여했다. 또 5개 권역의 지역 활성화와 생활 편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2개 지역 중심지로 설정해 육성 중이다.

김 실장은 "특히 서울의 300개 역세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거주지 대부분 집에서 5~15분만 나가면 지하철역을 만날 수 있고 역을 중심으로 온갖 편의·생활 시설이 구비돼 있다. 통제나 봉쇄로 위급할 경우 역까지만 나가도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흩어진 도심, 다핵적 구조와 함께 서울의 역세권은 팬데믹이 일상화된 시대, 안전하고 단절없는 도시 기능을 유지하는 거점 역할을 하게 된다.

◆재난 대비, '자족형 근린생활권' 모델 = 김 실장과 서울연구원 연구팀은 이 300개 역세권을 재난을 대비한 서울의 베이스캠프로 활성화할 것을 제안했다. 이곳을 일자리, 주거, 보육, 재택지원, 물류 유통, 보건 등 비대면 사회에 필요한 기능을 담는 그릇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역세권에 소규모 상점과 음식점, 생활 편의시설을 집적시키고 주 도로(메인 스트리트) 개념을 적용해 직장생활과 주거가 근접거리에서 이뤄지고 운동과 여가 등 일상생활도 역세권에서 모두 해결되도록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이를 구현하려면 다양한 아이디어와 함께 도시계획 변화도 필요하다. 역세권이 생활 중심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주거·비주거 기능이 결합한 역세권 활성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법, 역세권 활성화나 정비사업에서 확보한 공공 기여분을 지역에 필요한 생활 SOC를 비롯 스마트워크센터, 작은 사무실, 비대면 스튜디오 등 재택근무·온라인교육을 지원하는 공유 공간이나 자가격리 공간인 헬스텔, 보건지소, 노인층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센터 등 다양한 시설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김 실장은 "이같은 인프라가 역세권 중심으로 구축되면 웬만한 재난에도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족형 근린생활권이 실현된다"며 "늘어나는 온라인 배송을 해결할 권역별 물류거점, 공원녹지와 연계한 생활권녹지체계 등까지 더해지면 서울은 재난에 더욱 잘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내일신문-서울연구원 공동기획] 도시 변화의 방향은" 연재기사]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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