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심사 후 폐기' 법안 123개뿐 … 1만5천건 '임기말 폐기'

18대 이후 임기 중 폐기법안 급감하면서 입법발의 급증

의원들 '낙인효과' 우려해 암묵적으로 '폐기' 기피 굳어져

비슷한 법안 경쟁적으로 내놓아 법률반영실적 높이기도

법안의 옥석을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사람은 심사한 국회의원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옥석 가리가 평가를 관행적으로 거부하거나 엄격하지 않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평가 자체를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부담없는 대량 입법이나 부실 입법을 가능하게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에는 입법 과잉을 부추기는 관행들이 있고 의원들의 '입법실적 욕심'이 그 틈새를 파고 들어 한달에 1000건 가까운 법이 새롭게 나오는 '입법과잉시대'를 만들었다.

대화하는 진선미와 조응천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진선미 국토교통위원장과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국토위 간사가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사헌 기자


각종 사회 현안이 발생하면 비슷한 법안을 앞다퉈 발의하고 발의한 법안은 '대안법률'에 포함돼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취지만 비슷해도 '대안반영입법' 실적을 올릴 수 있다. 문제가 있는 법안이라도 '폐기'시키지 않고 '계류'시키는 관행도 부실입법을 부추긴다. 법 내용이나 체계에 문제가 있어 폐기조치된다면 유권자들 보기에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원들 내부에서는 암묵적으로 '폐기'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3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5월 30일부터 시작한 21대 국회에서 6850개의 법안이 제출됐고 이중 1403개가 처리됐다. 처리율이 20.5%다. 처리된 내용을 보면 원안가결(266개)과 수정가결(168개)을 합한 가결법안이 434개로 가결률이 6.3%였다. 가결법안에 대안반영폐기법안(876개)을 합한 법률반영(1310개) 비율은 19.1%다.

◆'대안반영'의 허점들 = 21대 국회에서 대안반영 폐기 법안은 전체 처리법안의 66.9%에 해당된다. 위원장 대안 법안들은 같은 이름의 여러 법안들을 하나로 모아 만든 것이다. 그 대안법안에 포함된 법률안들은 모두 '대안반영 폐기'된다. 내용이 서로 보완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비슷한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취지 정도만 비슷해서 논란이 될 만한 법안도 있다. 대안법안은 대부분 원안대로 가결된다.

21대 국회의 대안반영폐기법안과 대안법안의 수를 비교해 보면 하나의 대안법안은 4.8개의 법안이 합해진 것이다. 20대에도 대안반영폐기가 5563개, 대안법률이 1380개로 4.0개의 법안이 한 개로 모아졌다. 19대엔 3.8개를, 18대엔 4.0개를 하나로 만들었다. 비슷한 법안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국회 사무처 핵심관계자는 "무슨 사건이 발생하면 거의 비슷한 법안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언제부터 이게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 빨리 선수치는 게 임자다"면서 "그러면 대안법안에 포함되고 대안법안폐기로 간다"고 설명했다. 또 "대안반영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그 법안은 폐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의한 의원 입장에서 '폐기'보다 '대안반영 폐기'라는 실적을 쌓을 수 있어 대안반영 폐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행은 자연스럽게 의원들의 입법실적을 높이면서 발의법안수를 늘리고 법안반영률을 높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모 의원이 지난 8월 21일과 23일에 낸 동일한 이름의 법률 개정안 2개를 위원장 대안으로 합친 후 대안반영폐기 처리했다. 이 의원이 하나로 묶어 냈다면 한 개로 기록될 법률반영법안이 3개로 늘었고 이 의원의 통과된 법안실적도 2개가 됐다.

대안반영법안 없이 개별 법안을 심사해 통과시킨다면 원안가결되는 위원장대안법안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없다. 21대 국회의 경우 대안반영법안이 모두 가결됐다는 전제로 계산하면 처리율(6666개 중 1166개 처리)은 18.3%로 떨어지고 법률반영률은 16.9%로 낮아지게 된다. 대안반영 폐기법안을 정하는 기준이 별도로 없어 소위원장이나 전문위원실 등에서 '편의적으로' 묶는 경우가 적지 않는 것도 점검해야 할 대상 중 하나다.


◆폐기와 임기말폐기의 차이 = 의원들의 법안들을 폐기하지 않고 계류시켜 놓는 '관행' 역시 의원들의 입법발의 속도전을 주요 부추기는 요인이다.

법안 심사과정 중 부실이 드러났는데도 '폐기'하지 않고 판단을 미뤄놓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이에 따라 임기말 폐기되는 법안들이 산더미같이 쌓이고 있다. 임기말 폐기 법안들 중 상당수가 사실상 '폐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20대 국회 4년간 폐기된 법안은 1만5125개 였으며 이중 0.8%인 123개만 '심사후 폐기' 됐고 나머지는 임기말까지 남아 있다가 임기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국회 사무처 핵심관계자는 "법안소위에서 한 두번 심사했는데 뒤로 미뤄놓는다면 그 법안은 임기말폐기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라며 "사실상 폐기해야 할 법안"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원들이 동료 의원들의 법안 폐기를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그냥 계류시켜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심사를 하지 않는 관행이 있다"고 했다. '폐기' 의원의 입장을 고려해 부실입법도 그대로 계류시킨다는 얘기다.

◆조응천 "타성적으로 계속 심사로 뒀을 경우, 옥석 구분 안 돼" = 21대 들어서 7개월만에 폐기법안이 36개에 달했다. 이례적이었다. 같은 기간 20대엔 1개였다. 13대 이후 두자릿수 폐기는 19대(17개)뿐이었다.

게다가 국토위에서만 34개의 폐기판정이 나왔다. 지난달 17일 국토위 교통법안심사소위에서 조응천 위원장은 "혹시 우리 소위에서 폐기가 너무 많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면서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지혜를 발휘해 가지고 타협을 해서 옥동자를 생산할 만한 그런 것들과 그렇지 아니하고 그냥 타성적으로 계속 심사로 뒀을 경우에는 옥석 구분이 안 돼 가지고 나중에 이게 수백, 수천 건이 쌓이면 괜찮은 법이 뭐고 아닌 법이 뭔지를 (구분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좀 가혹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옥석을 구분해서 정말 괜찮은 법들을 집중적으로 심의하기 위해서 좀 취지에 안 맞는 것들은 폐기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고도 했다.

부실법안의 상징인 '심사후 폐기'법안이 18대(919개)까지 늘었다가 급격하게 줄었다. 전체 폐기법안 중 차지하는 비중 역시 13대 27.5%에서 18대까지는 10%대를 유지했으나 19대에 3.7%로 줄더니 20대인 1%이하로 내려앉았다. 입법 급증현상이 두드러진 시기와 맞물린다.

["입법 과잉 시대"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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