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인창고는 과학중점학급에 속한 학생들에게 수학·과학 과목을 일정 비율 이상 이수하도록 규정한 과학중점학교이다. 과학중점학교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과목 이수를 지향하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와 반하는 지점이 있다.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해 학교별 특성화와 공동 교육과정 구축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과학중점학교 인프라를 수학·과학 분야 교과특성화 학교로 전환해 운영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경기 인창고는 2021학년도 교육과정을 준비하며 과학 교과를 사회 교과와 묶어 전면 개방형으로 편성하는 변화를 시도했다. 사회·과학 과목에 대해 중점학급 여부와 관계없이 학생들이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학교 교육과정 방향과 철학을 놓고 공동체에서 지속적인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렀기에 가능했다.

인창고 1학년 수학 수업. 학생들은 모둠별로 서로 학습을 돕거나 주요 개념과 풀이과정을 칠판 앞에서 설명하며 체화한다. 사진 이의종


경기 인창고는 고교학점제에 앞서 도입된 2015개정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2021학년도 입학생(현 고1) 교육과정 편성에서 가장 큰 변화를 시도했다. 교육과정은 학교의 정체성이자 운영의 기본이라는 생각에 학교 공동체에서 지속적인 토론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모든 교육 활동은 △정규 교육과정 안에 끌어 들이고 △학생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과목을 정한 뒤 △확장·심화할 과목을 학습단계를 고려해 정하기로 했다.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히기 위해 과목별 이수단위는 최대한 통일하기로 했다. 동일한 선택군 안에 여러 과목이 묶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역할은 무엇인가' 본질적 질문 = 이 과정에서 김덕년 인창고 교장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김 교장은 "학교는 왜 필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학습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곧 학교 교육과정"이라며 "더구나 고교학점제에서는 이 질문이 더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교 공동체 토론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학 입시라는 현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를 놓고도 격론을 벌였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학교 교육과정의 방향과 철학에 있어 기본적인 세 가지 원칙을 정할 수 있었다.

원칙을 정하고 나니 길이 보였다. 인창고의 독특한 소통기구인 '3주체 회의(교사회 학생회 학부모회가 정기적으로 학교 운영 전반에 대해 협의)'와 '교사 대토론회'를 거쳐 자율 소통 토론 조화라는 학교운영 원리와 자존감, 호기심, 책임감, 자주성, 삶과 연계라는 5대 역량을 세우고 학교 교육과정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공통과목을 배우는 1학년 1학기는 기초 기본교육과 학교적응, 진로탐색에 초점을 둔다.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는 전문 및 심화 교육과정으로 교과 핵심개념과 융합지식을 확장하는 단계다. 3학년 2학기는 학생마다 다른 진로계획 실현을 지원하는 과정으로 3년의 교육과정을 설계했다. 2018년 행복지수 1위라는 덴마크 사회에 대해 다룬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를 읽고 독서토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시작된 덴마크 류슨스틴 고교와 국제교류를 학교 교육과정과 연계해 전교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덴마크 문화의 이해'라는 과목을 개설 했다.

사진 이의종

◆고교학점제 후 과학중점학교 길 제시 = 현 고1 학생들의 교육과정 편제표에서 기존과 가장 큰 차이는 학생들의 선택을 제한하는 칸막이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개선해나갔다는 것이다. 2021학년도 입학생 교육과정 편제표에서는 기존의 '과학중점과정 선택자에 한함'이라는 별도 표기가 사라졌다. 과학과목들이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목들과 동일한 선택군 안에 포함됐다. 예를 들어 경영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학생이 사회보다 과학을 더 배우고 싶으면 교육과정이 열려 가능한 형태가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선택 과목별 이수단위 통일이었다.

김 교장은 "과학중점학교를 운영하려면 3년간 수학·과학 교과를 총 이수단위의 45% 이상 이수하도록 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며 "학교 입장에서는 과학중점학급을 선택하는 인원수에 따라 지원되는 예산도 무시할 수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과학중점과정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그 과정으로, 자연 계열을 선택하고 싶은 학생들은 좀 더 자유롭게, 사회 과목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에게도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를 우선했다. 학생들 선택을 최대한 열어준 개방형 교육과정으로 가려면 사회·과학 교과 이수단위가 통일돼야 가능했다. 교과마다 특성이 있기에 이 과정이 학교 현장에서 쉽지는 않다.

김애경 인창고 사회과 교사는 "개방형으로 가면 사회과는 교사마다 3~4과목을 맡게 돼 수업과 출제 부담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지금도 두려움은 여전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선택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교육과정과 수업-평가 두 축 = 교육과정 편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인창고 교사들이 주력했던 것은 '수업-평가' 디자인이다. '학교 교육과정'이라는 큰 틀을 세운 뒤에는 '수업-평가'를 어떻게 설계해 채워나갈 지가 다음 과제다.

기초 교과와 과학·사회탐구 교과는 질문·토론 중심의 수업과 평가로 디자인하되, 핵심 성취 기준을 중심으로 프로젝트 주제를 추출해 창의융합 교과, 학교 특성 교과와 공유하기로 했다. 두 교과는 프로젝트 수업을 기본으로 하되 기초 교과와 탐구 교과에서 추출한 내용에서 주제를 선택해 학습이 보완, 융합되도록 했다. 학생들이 학생부 기록을 위해 개별적인 보고서를 제출하는 데 매몰되지 않도록 한 취지가 돋보였다.

위현진 국어과 교사는 "수행평가 100%로 설계한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이라는 과목을 개설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시 창작이나 게임 시나리오 창작 등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면서 평소 말수가 없거나 리더십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과학 과목들을 포함해 교육과정을 열 때 남는 문제 중 하나는 실험수업이었다. 인창고는 과학 실험실이 5개나 있지만 이마저도 부족해 교사마다 실험실을 미리 예약해야 했다. 실험수업을 위한 적정 인원이 20명 미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동일한 실험수업을 둘로 나눠 오전이나 저녁 시간을 활용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민 인창고 과학과 교사는 "고교학점제로 갈수록 과목수도 늘고 실험실습 비중도 확대돼야 할 텐데 현재는 이를 지원할 수 있는 공간적 행정적 인프라가 너무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인창고 교사들이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최정인 인창고 영어과 교사는 "내 수업에서 학생들이 행복하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소통하며 수업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곧 교사의 행복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학교 교육과정의 대원칙을 구성원들이 먼저 합의하고 과목 편제와 수업-평가를 촘촘하게 설계해가는 과정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교학점제로 가는 길목에서 인창고 사례가 돋보이는 이유다.

전호성·정애선 내일교육 기자 as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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