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탈레반이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국제사회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탈레반은 학생을 뜻하는 아랍어 '탈렙'(taleb)에 파슈툰(Pashtun)어의 복수형 어미 '안'(an)이 붙은 단어로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 종교학교)의 '학생들'을 가리킨다. 총칼을 들고 이슬람법이 실행되는 순수한 이슬람국가를 아프가니스탄에 세우겠다는 마드라사 학생들의 치열한 지하드(jihad, 聖戰)가 1996년에 이어 두번째 성공의 순간을 맞고 있다.

탈레반은 이슬람주의자다. 이슬람주의자란 근본주의자 원리주의자를 말한다.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순수한 아프가니스탄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그런데 이슬람법은 헌법이나 민법처럼 성문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Allah)의 계시를 예언자 무함마드가 전했다고 믿는 코란, 예언자의 언행, 초기 이슬람 공동체나 학자들 간 합의(의견일치), 새로운 사례를 기존 법에 대입해 살피는 유추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이슬람법이다. 지역마다 학자마다 학파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고, 온건하게 또는 과격하게, 부드럽게 또는 극단적으로 해석해 적용할 수 있다.

현대 근본주의자들은 코란과 예언자의 언행만으로 이슬람법을 해석하기도 하는데, 탈레반은 무엇보다도 과격하고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다. 데오반디(Deobandi), 와하비(Wahhabi), 파슈툰왈리(Pashtunwali)를 한데 버무려 폭력을 합리화하는 종교해석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예언자 시대 순수성 지향하는 데오반디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 인도의 무굴제국이 영국에 무너지면서 델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데오반드(Deoband)의 마드라사에서 반영국 순니 이슬람부흥운동이 시작됐다. 이슬람 역사를 돌이켜보면 식민지배 이전에는 무슬림 사회에서도 내적인 개혁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무슬림 사회의 개혁운동은 이슬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쪽으로 강화됐다. 데오반드의 마드라사 역시 오래된 새길, 즉 예언자 시대의 순수성을 재현하기 위해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해석 교육을 시도했다. 데오반드의 이슬람부흥운동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오반디라고 부른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면서 파키스탄의 데오반디들은 소수 무슬림이 다수 비무슬림과 협력하면서 지내려는 인도 데오반디들과는 달리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이라는 새로운 정체에 맞는 사회환경을 더욱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서구의 근대적 삶에 맞서 이슬람은 성과 속의 이분법이 없는 총체적 삶의 양식이라고 강조했다.

친소정권 붕괴를 막고자 소련은 냉전시대인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에 아프간판 '베트남 전쟁'을 선사하기 위해 지하드(Jihad)를 하는 사람들, 즉 무자헤딘(Mujahedin)을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양성해 전장에 투입했다. 이들 무자헤딘은 파키스탄의 '자미아툴 울라마에 이슬람'의 데오반디 교육을 받았다. 미국의 바람대로 1989년 2월 소련이 패퇴했다.

소련이 물러간 아프가니스탄은 정정 불안 끝에 결국 1992년부터 내전에 돌입했다. 무정부 상태를 종식하고자 1994년 남부도시 칸다하르(Kandahar)에서 무자헤딘 출신 이슬람교 지도자 오마르(Omar)가 탈레반을 결성했고,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1996년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다.

극단적 와하비, 남성중심적 파슈툰왈리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일어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혁명의 전파를 막고자 석유판매로 얻은 엄청난 달러를 풀어 와하비 이슬람법과 사상을 무슬림 세계 곳곳에 전파했다. 와하비는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Muhammad ibn Abdul Wahhab, 1703~1792)의 이슬람사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이념이다.

압둘 와합의 친형 술래이만이 "동생은 '하나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가 그분의 종이고 사도라고 증언하며 예배, 희사, 라마단월 단식, 순례를 행하고, 하나님 천사 성서 사도를 믿는 사람들을 불신자라고 선언'하고 그들이 사는 곳을 전쟁터로 만든다"고 비판했을 정도로 와하비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무슬림을 불신자로 규정하고 사지로 몰아넣는 극단적 사상이다. 탈레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지원을 받고 와하비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와하비 사상의 영향권에 들어가 한층 더 과격해졌다.

탈레반의 주축은 파슈툰족이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2%인 약 1500~1600만명을 차지하는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영국이 그어놓은 이른바 듀란드선(Durand Line)의 동쪽 파키스탄에도 무려 약 4000만명이 산다. 여러 하위 부족으로 구성된 파슈툰족은 이슬람 전파 이전부터 부족 특유의 불문관습법인 '파슈툰왈리'를 소중하게 받들어왔다. 명예 환대 연대의식 상호공조 보복 등의 덕목을 가르치는 관습규범으로, 파슈툰족의 명예와 생존을 위해 부족원이 지켜야 할 책무를 규정한다.

탈레반은 파슈툰왈리보다 이슬람법을 앞세우는 듯 보이지만 실제 이들의 삶에서 부족의 관습은 지울 수 없는 저변을 이룬다. 특히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인 파슈툰왈리의 여성관이 극보수적인 이슬람법 해석과 만나 여성을 2세 생산도구, 남성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체로 만들었다.

탈레반의 주축은 파슈툰족 중 길자이(Ghilzai)족이다. 길자이족은 유목 중심의 어려운 경제환경에 특화돼 용맹하고 독립심이 강하다. 길자이족의 경쟁 상대는 두라니(Durrani)족이다. 길자이족과 달리 두라니족은 농경사회의 혜택을 받은 부족이다. 이들은 정치엘리트로 파슈툰족을 좌지우지하며 1747년부터 소련 침공 직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다. 투쟁에 특화된 길자이족은 외부의 침입에 항상 용맹하게 투쟁하지만, 승리의 과실은 항상 두라니족이 챙겼다. 미국은 이러한 파슈툰 내부의 역학관계를 소홀히 했다.

2001년 탈레반을 축출하고 미국이 세운 아프간정부의 대통령 카르자이(Karzai)는 두라니족이었다. 탈레반이 장악한 헬만드주의 2009년 대선 참여율은 불과 5%였다. 탈레반의 위협을 무시하고 투표할 파슈툰족은 없었다. 더욱이 카르자이는 파슈툰이지만, 비파슈툰이 카르자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기에 불만이 컸다.

"파슈툰은 싸울 때만 평화롭다"는 말처럼 부족 중심 사회는 "나는 형제와 맞서고, 나와 형제는 사촌에 맞서고, 나와 형제와 사촌은 세상에 맞선다." 탈레반은 독립심 강한 길자이를 이슬람으로 결속하려고 했다. 미국이 끊임없이 투쟁하며 자신의 몫을 확보하는 부족사회의 특질을 간파해 탈레반에 동조하지 않는 길자이족 파슈툰을 회유해 정권에 참여시켰다면 현재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근본주의적 신앙체계 못 바꿀 것

20년 전 탈레반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자의적인 이슬람법 해석으로 여성과 소수자를 사지로 몰아넣는 공포정치를 펴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지금 탈레반은 과거와는 다르다며 연신 여론전을 펴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현실이다.

국제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당분간 유연한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결국 과거와 다를 바 없는 극단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데오반디 와하비 파슈툰왈리가 버무려진 이슬람주의를 치열하게 성찰하지 않고서는 극단주의적 신앙체계를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법의 틀 안에서 여성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 역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20년 전 이슬람법 해석이 지금과 다르지도 않다. 무슬림 세계와 함께 탈레반을 제어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착잡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