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열 전 캐나다총리 수석정책고문, 전 자유당 정책실장

캐나다는 모든 영연방 국가처럼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오래된 고유의 정치·투표제도를 사용해 민주주의의 제도적 문제점을 보완해왔다. 거기에는 각 국가 나름의 규칙과 전통이 있다. 캐나다도 마찬가지다.

흔히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강조되는 '대헌장'(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은 우리로 치면 고려 고종 때인 1215년 영국의 존 왕이 서명한 문서로, 많은 변화와 진보를 거듭해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의회의 승인없이 과세할 수 없으며'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으면 자유인 신분을 가진 사람을 체포·감금할 수 없다'고 정해 영국뿐 아니라 전세계 인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지만 막상 영국에는 헌법이 없다.

1215년 설립되었고 1708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의회가 등장한 영국식 내각책임제에서는 세금처럼 중요한 재무관련 법안(Money bill)이 국회에서 부결되면 이유불문하고 내각과 정부는 사임하고 국회는 해산되며 선거를 치르게 된다.

제왕적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총리 권한

영국은 대헌장 같은 역사적 사회계약과 조약, 국회를 통과한 법안, 법원 판례 및 판결, 법학 전문학자 의견, 정치적 전통이 합쳐져 실질적인 헌법의 역할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정당 및 정치체제의 전통과 규칙이며 국회해산 전통도 여기에 속한다. 1867년 독립국가가 된 캐나다는 짧은 의회 역사로 영국 의회 전통을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국가의 수반은 왕이며 정부의 수반은 총리다. 캐나다 총리는 정부 수반이며 총독(Governor General)이 상징적인 국가 수반이지만 국회해산 동의 등 약간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시절 캐나다 최고통치자는 영국 왕의 권력을 대행한 총독이었는데 독립 후에도 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캐나다 총독은 총리가 임명하기에 영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제는 여성 아시아인 원주민 등을 총독으로 임명해 캐나다의 국가 정체성과 도덕성, 다양성을 보여준다.

영국은 귀족들로 구성된 상원(House of Lords, 귀족의회)과 평민들로 구성된 하원 (House of Commons, 평민의회)의 양원제다. 귀족이 없는 캐나다는 귀족의회(House of Lords)라는 명칭 대신 상원(Senate)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캐나다 총리가 상원의원을 임명하며, 상원은 아무런 기능이나 권력이 없는 명예직 경로당이다.

우파 캐나다 보수당이나 좌파 자유당은 야당 때에는 상원폐지를 요구하고 선거 때만 되면 이를 공약으로 내건다. 하지만 정권만 잡으면 정치자금 공급력, 당 충성도, 선거에서 낙선한 의원 구제 등 당 운영의 활용창구로 이용하기에 캐나다 상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내각책임제는 국회의원 과반을 획득한 당이 집권하며 국회의원이 총리와 장관을 겸임한다. 총리 즉 Prime Minister는 내각을 구성하는 장관 중 대표인 제1장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입법부와 행정부는 하나이고 당 대표는 총재(Chair) 대신 당수(Leader)라는 명칭을 쓴다. 당 대표가 총리가 되는데 총리의 힘은 대통령제에서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막강하다. 제1야당 대표도 당수(Leader of Opposition)라고 부른다.

총리 즉 모든 인사권을 갖고 있는 당 대표의 국회의원 공천권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당 대표가 특정후보를 선호하면 그걸로 결정난다. 당 대표 비서실의 권력은 어떤 장관도 넘보지 못하며 장관이나 의원들이 당 총회를 통해 당 대표를 사임시켜 총리직에서 내려오게 하는 당내 쿠데타가 유일하다. 쿠데타에 실패하면 제명이라는 사약을 받고 성공하면 당수가 되어 총리가 되는데 역사적으로 성공한 쿠데타도 있었고 실패해 역적이 된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 대안으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내각책임제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권한을 줄이려는 의도와 목적으로 내각책임제를 채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각제에서는 사법부 독립이 가장 중요

내각책임제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대통령중심제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독립된 사법부가 존재한다. 특히 영국식 내각책임제는 이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 정부나 의회는 사법부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사법부 또한 확실하게 정부·국회와 거리를 둔다.

캐나다나 영국에서는 법에는 없지만 특정 직업을 갖는 사람은 정치를 못하게 하는 불문율이 있다. 대표적으로 판사 감사위원 기자 등이 이 그룹에 속하는데 판사를 그만두고 정치를 하거나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경우는 극단적인 예외이며 일반적으로 사회적 용납이 안된다. 캐나다의 경우 판사는 은퇴 후 변호사 업무도 하지 않는다.

판사는 추후 정치입성이 불가능하니 정치로부터 자유롭고 사임 후 전관예우로 돈을 벌 수도 없으니 사법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존경과 신뢰는 유지된다.

대신 정부는 변호사협회에서 판사 임용 추천서를 제출하면 이의 없이 그대로 임용을 진행하는 절대적 전통을 지킨다. 판사 임용에 어떤 정치적 결정 요소도 안 들어간다.

법원의 한 사무실에 90만달러짜리 공기청정기가 설치돼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원인은 담배를 피는 판사 때문이었는데 모든 정부 건물에는 금연이 제도화되었지만 판사는 정부 규제 밖이기에 담배를 필 수 있었다. 이때 타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자기 사무실에 공기청정기를 설치하라는 판사의 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였으며 이를 야당과 국민도 수용했다. 사법부 독립의 한 사례다.

한국이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면 이런 영국 전통을 승계할 수 없으니 모든 걸 법으로 정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대법원장이나 감사원장을 한 이가 대통령에 출마하고 판사가 정치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한국에서 절대적으로 독립적 사법부가 필요한 내각책임제가 가능할까?

토론 능력 중요한 캐나다 정치

내각책임제 국회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마주보고 앉아 구두로 정책토론을 한다. 이때 준비한 원고를 읽으면 국회의장이 발언을 중단시킨다. 이슈를 이해 못하기에 원고를 본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론능력이 없으면 정치를 하지 못한다.

국회토론 중 발언자에 대한 야유와 놀림도 많이 오간다. 야당 당수 시절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 전 총리는 배가 나온 여성 장관 모니크 베쟝과 정책토론 중 밀리자 프랑스어로 "애는 언제 낳는데?"는 식의 야유를 던지며 복수했다.

쥐스탱 트뤼도 현 총리의 아버지인 피에르 트뤼도 전 총리도 1971년 국회에서 야당의원과 논쟁하다 화가 치밀자 영어로 최악인 "Fuck off"라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 반대로 정치에 대해 "The universe shall unfold as it should"라는 명언도 남겼다. 직역하면 '모든 건 우주 뜻대로 간다'이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가 아마 가장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의사당에서는 더한 욕설도 오가지만 토론 중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확실히 구분되는데 이 또한 불문 전통에 의거한다.

같은 영국식 내각책임제인 호주의 경우 자유당이 보수이며 노동당이 진보인데 캐나다에서는 자유당이 진보다. 캐나다 보수당은 선거에서 판판이 자유당에 지면서 사회와 국민이 진보를 원한다는 걸 인정하고 1942년 당 명칭을 진보보수당(Progressive Conservative)으로 개명했다. '동그란 삼각형'처럼 앞뒤가 안 맞는 새 이름으로도 계속 선거에 지자 2003년 보수당 원래 명칭으로 되돌아갔고 2004년 선거에 이겼다. 20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에서는 자유당이 승리, 집권 3기를 이어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