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에 무혈 입성하면서부터 아프가니스탄 소식은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탈레반 스스로 20년 전과는 다르다고 만천하에 선언하고, 휴대전화와 인터넷 등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는 젊은층이 넘치는 오늘날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예전과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동조하는 일부 전문가의 예상과 달리, 20년 만에 재집권한 탈레반의 아프간 현실은 암울하기만 하다.

탈레반은 달라졌다고 외치지만 국제사회의 우려대로 여학생의 교육 기회는 사라지고 있다. 새로 구성된 정부 요직은 전원 남성에 탈레반 일색이고, 33명 중 무려 14명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지정한 테러리스트다. 내무장관 시라줏딘 하카니(Sirajuddin Haqqani)는 미국 연방수사국이 1000만달러 검거 현상금을 내건 인물이다.

아프간을 통째 넘긴 미국의 실수

그렇다면 달라진 것 없는 탈레반이 생환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1979년부터 2001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수장을 지낸 투르키 알파이살(Turki al-Faisal) 왕자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탈레반과 협상을 할 때부터 아프간정부가 정통성을 잃었다고 꼬집었다. 정부를 제쳐두고 미국이 적과 협상을 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란의 아프간 전문가 자파리안은 정부 지도자들이 막후협상을 통해 탈레반에게 아프간을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고 주장했다. 그같은 주장의 근거는 수없이 많다.

아프간의 가니 대통령은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맞댄 우즈벡인들의 거주지 파르얍(Faryab) 주지사로 파슈툰족 출신 로그마니(Loghmani)를 임명했다. 그러나 우즈벡 주민들은 '파슈툰족 주지사가 파슈툰이 주축인 텔레반에게 파르얍주를 넘길 것'이라면서 결사반대, 결국 임명안을 철회시켰다. 그러자 가니 대통령은 로그마니를 파르얍주 대신 가즈니(Ghazni) 주지사로 보냈다. 그런데 로그마니는 두달 만에 가즈니주를 탈레반에게 넘겨주었다.

또 국가안보보좌관 모헵은 파라(Farah)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탈레반과의 전투를 멈추고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모헵은 미국에서 자랐고, 배우자는 미국인으로 CIA 직원이다. 모헵이 전화를 걸 당시 정부군은 파라주에서 탈레반에 승리할 가능성이 큰 상태였다.

탈레반은 불과 서른 시간 만에 남부 거점 칸다하르를 비롯한 9개 주를 손쉽게 점령했다. 칸다하르와 헤라트는 육로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오전에는 칸다하르, 오후에는 헤라트를 장악했다. 오토바이와 대전차포, 소련제 칼라시니코프 소총만으로 무장한 탈레반이 혁혁한 전과를 거둔 데에는 정부와 탈레반 사이에 거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9년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인구조사를 하지 못한 아프간의 정확한 인구수 집계는 늘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모두 14개 민족으로 구성된 아프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파슈툰족으로 약 42%를 차지한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말은 아프간의 땅이라는 뜻이다. 6세기 경 '아바가나'에서 나온 말인 아프간은 파슈툰족을 가리킨다. 아프간이라는 말이 정치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18세기 중반 파슈툰족이 우위를 점하면서부터다.

'위대한 파슈투니스탄'이라는 불씨

1978년 4월 공산당의 쿠데타는 1747년부터 이어져 온 두라니(Durrani) 파슈툰족의 집권을 무너뜨렸다. 권력을 쥔 급진노선 할끄(Khalq)파의 타라키(Nur Mohammad Taraki)는 길자이(Ghilzai) 파슈툰족인데, 마르크스주의를 파슈툰족보다 우위에 두어 파슈툰족 지지기반을 잃었다.

1979년 9월 할끄파 내부 권력다툼 속에 타라키를 죽이고 1인자가 된 길자이 파슈툰족의 아민(Hafizullah Amin) 역시 파슈툰족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그 역시 같은 해 12월 24일 소련 침공으로 목숨을 잃었고 비파슈툰족 파르참파의 카르말(Babrak Karmal)이 정권을 잡았다. 할끄파의 무모한 권력욕이 길자이와 두라니로 양립한 파슈툰족 내 불화에 기름을 붓고, 더 나아가 아프간 내 민족분쟁의 불씨를 키운 셈이다.

공산주의자도 이슬람주의자도 자신이 속한 부족보다는 공산주의 사상과 종교적 신념을 더 앞세운다지만, 아프간의 역사는 파슈툰족이라는 기득권이 중요한 변수임을 보여준다.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주축이다.

물론 파슈툰족 모두가 탈레반이거나 탈레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칸다하르(Kandahar)주의 스핀볼닥(Spin Boldak)에서 탈레반은 아차크자이 파슈툰족 100여명을 학살했다. 2018년 탈레반에 살해당한 아차크자이 파슈툰족 출신 압둘 라지크(Abdul Raziq) 장군의 묘도 트랙터로 밀어버렸고, 그의 가족이 살던 집도 불태웠다.

탈레반에게 뺨을 맞는 동영상이 전세계에 퍼져 보는 이의 분노를 자아낸 아프간의 코미디언 모함마드(Nazar Mohammad)도 아차크자이 파슈툰족이다. 그는 압둘 라지크 장군 가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파슈툰족 내에서도 탈레반과 갈등을 빚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1893년 영국 외교장관 듀란드(Durand)는 100년이라는 유효기간을 설정하면서 당시 인도와 아프간의 국경선을 그었다. 이른바 듀란드라인(Durand Line)이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듀란드라인은 현재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1893년 이래 아프간은 단 한번도 듀란드라인을 인정한 적이 없다. 탈레반 역시 마찬가지다. 아프간에게 듀란드라인은 제로라인(Zero line)이다. 실질적으로 100년이 된 1993년 이래 효력조차 없는 국경선이기 때문이다.

아프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동안 탈레반을 적극 후원하며 이용해온 파키스탄에게도 듀란드라인은 고민거리다. 그도 그럴 것이 탈레반의 주축인 파슈툰족이 '위대한 파슈투니스탄'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듀란드라인을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쪽에는 아프간보다 더 많은 파슈툰족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탈레반의 기반이다. 탈레반에는 바로 파키스탄쪽에 거주하는 파슈툰족이 가담하고 있다.

게다가 파키스탄에는 아프간 탈레반과 별도로 파키스탄 탈레반이 존재한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파키스탄정부의 골칫거리다. 파키스탄군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테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슬람원리주의와 파슈툰민족주의를 결합해 '위대한 파슈투니스탄'을 건설하고자 나선다면, 파키스탄에게는 악몽 중의 악몽이 될 것이다. 물론 아프간 탈레반이 이를 지지하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또 파키스탄보다 인구가 적은 아프간 파슈툰족은 파슈투니스탄이 생길 경우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탈레반, 권력 좇는 불나방일 뿐

미국이 철수하면서 탈레반과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IS'의 불꽃 튀는 전쟁이 시작된 듯하다. 사실 양자의 관계는 애매하다. 탈레반이 구성원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S가 탈레반일 수도 있다. 사실 아프간 북부 지역에서 탈레반으로 활동하는 조직은 대부분 IS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탈레반에 숨어버린 IS는 탈레반으로서도 골치 아픈 존재일 것이다.

1978년 4월 공산주의 쿠데타 때 할끄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조직 내로 파고들어 군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탈레반 속으로 숨어버린 IS가 할끄파처럼 고개를 들 날이 올 수도 있다. 아니면 탈레반 내 강경파 산하조직 하카니가 상대적으로 온건한 두라니 파슈툰족 출신의 탈레반 2인자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제압했듯, 탈레반의 강경노선이 아프간에 짙은 먹구름을 몰고 올지 모른다.

탈레반 중 어느 파가 안정적으로 권력을 쥘까? 종교는 겉옷이다. 탈레반은 권력이라는 불길에 뛰어든 나방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