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아프리카 중동연구부장

20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미국이 21세기 초입부터 싸워온 전쟁이었다. 상대는 탈레반이었다. 2001년 10월 7일 개전과 함께 허망하게 무너졌던 탈레반은 2021년 8월 말 다시 권력을 잡았다. 미국 시민들, 그리고 국제사회는 명확히 깨달았다. 압도적 화력으로 특정한 세력은 쉽게 무너뜨릴 수는 있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 전쟁에서 미군 병사 2448명, 나토 및 동맹국 병력 1144명,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6만9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현지 민간인들도 4만7000명 넘게 희생되었다. 탈레반 5만1000여명 포함 도합 24만명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비는 2조2700억달러(2700조원)를 사용했다. 그리고 아프간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탈레반이 권좌에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 전쟁은 왜 했을까?

명분 있지만 장기화되면서 수렁에 빠져

아프간전쟁은 9.11테러에 대한 미국의 즉각적 조치였다. 탈레반이 알카에다 핵심 인사들의 신병인도를 거부하며 미적대자 본토를 공격받은 미국은 자위권 차원에서 테러리스트를 보호하는 아프간을 타격한 것이다. 정당성 논란이 벌어졌던 2003년 이라크전쟁과 달리 명분 면에서 흠결이 없는 전쟁이었다. 국제사회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의 공격은 매서웠다. 개전 후 두달도 채 지나지 않아 탈레반 세력은 궤멸되었고 알카에다 거점도 무너졌다. 아프간에는 새로운 세속주의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아프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공을 들이면서 미국의 전략은 꼬이기 시작했다. 게릴라전에 나선 탈레반과 지하디스트를 격퇴하는 전쟁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사실 아프간 국민들은 1996년부터 5년 넘게 지속되었던 탈레반의 극단주의 통치를 대부분 혐오했다. 미군은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탈레반이 전국 각지에서 일종의 진지전을 펼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해방군이었던 미군과 나토군은 점차 지쳐갔다.

대규모 공습에도 현지 부족들과 밀접하게 연계된 토착 탈레반 세력은 궤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오바마정부는 출구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았다.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 주겠노라고 호기롭게 들어왔다가 성과없이 철군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 대통령에게 전쟁을 시작하는 일은 차라리 쉽다. 종전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애매한 철군은 자칫 패전의 주역처럼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단호했다. 9.11테러 20주기에 맞춘 철군완료 계획을 선언했고, 그대로 이행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판단 실패로 상처를 입기도 했다. 미국이 공 들여 교육·훈련을 해왔던 아프간 군경이 생각과 달리 빠르게 탈레반에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부군이 연말까지는 버텨줄 것으로 믿었지만 파죽지세로 카불을 향해 진격하는 탈레반의 속도에 당황했다. 결국 탈레반 재집권을 목전에 두고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의 공항 쇄도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맞물리면서 190여명이 사망하는 카불공항의 비극을 목도해야만 했다.

미, 만기친람형 국제문제 관여 방식 정비

왜 바이든 대통령은 다소 무모해 보이는 철군을 전격적으로 시행했을까?

그의 입장은 이전부터 확고했다. 바이든은 2008년 초 상원의원 시절 아프간을 방문했다. 그는 아프간을 돌아보며 미군이 군사력으로 이 나라를 환골탈태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후일 술회했다. 특정 국가의 미래는 미국의 힘이 아닌 그 나라 국민 자신들의 책임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책임과 맞물리는 주권도 아프간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대신 미국은 아프간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요하면 국제사회와 함께 개발지원을 해주며 안정화를 측면 지원하는 게 맞다고 믿었다.

그해 오바마정부의 부통령으로 취임한 후 8년 임기 동안 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당연히 더 많은 미군 병력을 아프간에 증파해서 아예 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국방부 및 군산복합체의 주장과 충돌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철군을 주장하는 부통령과 증파를 원하는 군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대규모 증파도, 철군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전황은 교착상태로 들어갔다. 미군의 피해는 하염없이 늘어났다.

올 초 대통령에 취임한 바이든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소신인 철군을 추진했다. 단순히 2008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을 체계적으로 견제하고 압박해야 하는 절실한 상황변수도 있었다. 미국의 만기친람형 국제문제 관여를 정비하고 선택과 집중 기조로 들어가려 했다. 지구상에 벌어지는 모든 부조리와 폐해를 해결하겠노라 나섰던 과거 질서의 선도자 역할을 할 의지가 없음을 선언한 셈이다.

국제사회는 미군의 철군을 대략 예상했지만 전격적으로 시행되자 적잖이 놀랐다. 미국은 중국의 위구르 탄압의 반인권 정책을 성토하고 있지 않던가. 홍콩 민주화시위를 폭력적으로 눌렀던 데 대한 비판도 거셌던 것을 기억하는 마당이다. 이 시점에 미군의 전격 철군으로 아프간 국민들이 탈레반 극단주의의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리게 된 상황을 합리화하기란 쉽지 않다. 바이든의 입장은 명확했다. 아프간 국민들이 위험에 처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국정부에게는 자국 병사들의 안전, 즉 국가이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소 생경하게 들렸다. 그간 미국은 늘 국제사회의 질서 수호자 역할을 자임해왔기 때문이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효만료 징후

아프간에서의 미군철군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前兆)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주어진 세상을 투영하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상서롭지 않은 미래라는 점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효가 만료되는 징후이기도 하다. 앞으로 미국은 '해야 할 일'(should we) 대신 '할 수 있는 일'(can we)에 집중할 태세다.

자유주의 국제질서 선도 국가의 임무 종료 선언은 곧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민낯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표한다. 모두가 자기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하는 세상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해 보다 명확한 요구를 던질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국익의 기반 위에 원칙과 가치를 담는 외교정책을 펼쳤지만 이제는 완연히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 철군 과정에서 정보실패로 치욕적인 경험을 한 직후임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오커스(미국 호주 영국) 협력연대 출범을 선언했다. 소위 앵글로색슨 민족동맹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포함된 파이브아이즈(Five eyes) 국가들은 베이징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체성 정치의 선명한 일단을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동심원의 핵에 민족 정체성이 자리하고 있고, 점차 외곽으로 동맹과 우방을 포진시킬 것이다. 이를 비판하고 탓할 수는 없다. 자국의 이익 추구야말로 정부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긴장하고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카불공항에서 전세계로 타전된 지옥도와 같은 탈출 장면과 테러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판의 이동과 변화의 여파가 더 크다. 미국의 노선 변화는 국제질서의 격변을 예고하며 새로운 시대를 암시한다.

로버트 케이건의 암울한 책제목처럼 '정글이 다시 자라나고 있다.' 함께 정원을 가꾸려 해왔던 안온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각자 자기 정원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담을 쌓고 있다. 2022년을 앞둔 아프간발(發) 불안한 시대의 전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