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환 언론인, 경기대 교수

기후위기와 팬데믹, 미·중·러 패권전쟁, 극우 부상, 양극화 심화 등 국내외 거대한 전환기를 맞은 독일 민심은 변화와 도전을 선택했다. 16년 집권한 기민당(CDU)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물러나고, 사민당(SPD) 출신 올라프 숄츠 총리가 집권했다.

숄츠 내각은 3가지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먼저 독일 16명의 연방정부 장관 중 남녀가 각각 8명씩 차지하는 최초의 성평등 내각이 출범했다. 외무·내무·국방장관 등 외교안보를 책임지는 자리는 모두 여성장관이 맡았다. 총선 민심인 연방의회 의석 비율에 따라 사민당이 총리와 6개 부처, 녹색당(Grunen)이 부총리와 5개 부처, 자민당(FDP)이 4개 부처 장관을 맡았다.

둘째, 최초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각 정당의 상징색인 사민당 빨강색, 녹색당 녹색, 자민당 노란색의 '신호등연정'이 이뤄졌다. 중도좌파·진보·자유보수의 가장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담아내며 독일 정치의 전통인 연정을 이어갔다.

셋째, 젊은 내각 출범이다. 1980년생인 가족·유소년·장년·여성부 슈피겔 장관과 외무부 베어보크 장관 등 내각의 평균연령이 50세로 낮아졌다. 또 사상 처음으로 터키 이민자 출신 2세가 농림부 장관에 올랐다.

약자와 노동자 '존중'을 중심가치로

신호등 연정은 9월 총선 이후 약 두달 간 집중적인 논의와 협상을 통해 '더 많은 전진을 감행한다'는 제목의 연정협정문을 발표했다. 부제는 각 정당의 기본 철학을 담은 '자유(자민당), 정의(사민당), 지속성장(녹색당)을 위한 동맹'이다. 이 협정문은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분량으로 총 177쪽에 이른다. 각기 다른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세 정당이 합의로 도출한 연정협정문은 향후 4년 간 독일을 이끌고 갈 기조와 콘텐츠를 담고 있다.

연정협정문을 분석해보자. 먼저 국정철학 차원에서 메르켈정부가 대연정으로 '통합'에 방점을 뒀다면 숄츠정부는 약자와 노동자 등 '존중'에 중심가치를 두고 있다. 능력주의와 차등을 배격하고 모든 직업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철학이다. 또한 각기 다른 정파의 연정인 만큼 '단결'을 강조한다.

협정문은 또 '독일의 현대화'를 주요 화두로 제시했다. 중도좌파 성격을 띠지만 실용주의를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무엇보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독일이 더 진화해야 한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신호등 연정을 통해 독일이 자랑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진화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시장에서 질서 있게 경쟁하고, 그 과실을 국민 골고루 나누는 독일식 자본주의 모델이다. 경쟁과 성장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복지를 추진하는 것이다. 미국식 정글 자본주의도 아니고,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연정협정문에 처음으로 '사회 생태적 시장경제'(sozial-okologische marktwirtschaft)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생태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녹색당이 연정에 참여하면서 기후변화와 '생태 경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도전에 맞서 담대한 전환을 이뤄내자는 것이다.

디지털 궐기, 에너지전환, 새 외교안보

또한 연정협정문을 토대로 신호등 연정이 합의한 중요한 정책들은 무엇인가. 이전 정부와 달리 숄츠정부가 역점을 둔 정책은 크게 세 영역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디지털 궐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에너지전환 정책, 그리고 새 외교안보 정책이다.

먼저 디지털 혁신을 보면, 2011년 메르켈 총리는 세계에서 처음 '인더스트리4.0'이라는 새 그랜드플랜을 제시했다.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신기술을 활용해 제조업의 디지털화로 경쟁력을 높이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숄츠정부 역시 독일의 정치적 전통을 따라 이전 정부들의 좋은 정책을 계승하면서 혁신을 이어가고 있다. 아데나워 총리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파가 다른 브란트 총리가 이어받았다.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과 사회보장제도'를 콜 총리가, 슈뢰더의 '사회노동 혁신'(아젠다 2010)을 메르켈 총리가 이어 받아 독일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숄츠정부 역시 메르켈정부의 인더스트리 4.0을 업그레이드해 독일 전체의 디지털 혁신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디지털' 단어가 들어간 '교통디지털부'가 출범했다. 탈규제를 주장하는 자민당(FDP) 출신 폴커 비스링이 장관을 맡았다. 더 빠른 인터넷을 위해 나라 전역에 5G 인프라를 구축하고, 모빌리티 디지털화를 촉진하며, 전 영역에 인공지능 로봇 등 신기술 개척과 활용에 나선다는 것이다.

독일경제의 핵심 축은 자동차산업이다. 모빌리티 디지털화는 네트워크화 자율주행차 등이 주요 목표다. 디지털경제는 스타트업, 중소기업 디지털화, 플랫폼에 중점을 두면서, 데이터 보호와 보안에도 관심을 둔다.

둘째, 기후위기를 맞아 지속성장이 가능한 환경·에너지전환 정책이다. 녹색당 대표 출신인 로버트 하베크 장관이 경제부를 맡아 '경제·기후보호부'로 명칭을 변경했다. 기후·환경 현안을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환경부 역시 녹색당 출신이 장관에 취임했다. 탈석탄 시기를 기존 2038년에서 2030년으로 앞당기기로 했다. 풍력·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비율을 2020년 40%에서 2030년 80%로 끌어올리고, 이때까지 전기자동차 1500만대 확충, 철도 화물운송 25% 확대를 달성키로 했다.

하지만 독일 새 정부의 에너지정책은 출범 초기부터 난제에 부딪혔다. 2022년 1월 초에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가 원자력을 가스와 함께 기후친화적인 '녹색' 에너지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전건설 시한을 2045년으로 한정하기는 했다. 프랑스 등 원전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삼고 있는 많은 나라들은 원전을 '그린 택소노미'로 보고 있다. 네덜란드·폴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파리협정에 따른 에너지 전환 목표를 맞추기 위해 원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독일은 원전을 '그린워싱'(녹색 위장)이라고 비판한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천 참사를 계기로 독일은 세계 처음으로 '탈핵'을 선언한 바 있다.

셋째, 새로운 외교안보 정책이다. 녹색당 대표 출신인 안나레나 베어보크가 외무부장관에 취임했다. 외교안보 역시 이전 메르켈정부와 차이를 보이고 있고, 연정에 참여한 여러 정당 간 충돌도 예상된다. 베어보크 장관은 외교스타일과 대중연설에서 MZ세대다운 모습을 보인다. 1월 11일 이탈리아 방문 당시 외무부장관과 청사에서 만나는 전통을 깨고 카페에서 회담을 가졌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스타일이다.

또한 중국 러시아 터키 등 권위주의 국가에 대해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는 "EU는 위구르족 인권을 침해하는 중국 신장 지역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며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노르트스트림2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베어보크는 메르켈과 달리 경제적 이익보다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가치 중심의 외교를 펴겠다는 의지다.

외교안보 정책에서 중·러에 온화적인 사민당 숄츠 총리와 강경한 녹색당 베어보크 장관의 노선 차이로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다른 역할이 레버리지(지렛대)로 작용해 더 나은 외교적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네거티브·포퓰리즘 대선에 주는 시사점

독일 숄츠호가 새 실험으로 순항할지 암초에 부딪히게 될지는 '허니문 시간'을 지나야 제대로 예측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독일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포지셔닝과 미래 과제를 예측할 수 있다. 시대정신을 담은 비전은 보이지 않고, '네거티브와 포퓰리즘' 공약이 판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20대 대선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김택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