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은 오늘날 이스라엘에 자리잡은 고대 유다왕국을 멸망시키고, 성전을 파괴하고, 주민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았다. 1978년 발매하여 세계적인 인기를 끈 흑인 혼성그룹 보니엠(Boney M)의 '바빌론강'(Rivers of Babylon)은 노예로 끌려온 유다 주민의 애환을 담은 히브리성서(구약성서) 시편 137편에 곡을 붙인 노래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제국을 멸해 불쌍한 노예들을 해방시킨 이는 오늘날 이란인들의 조상인 페르시아제국의 쿠로슈(고레스) 대왕이다. 쿠로슈는 해방 노예들이 원하면 고향 땅에 가서 살도록 해주었고 그곳을 속주로 삼아 예후드, 주민을 예후디라고 불렀다. 예후디의 후손이 이룬 나라가 오늘날 이스라엘이다. 예후디인들은 쿠로슈를 메시아로 부르는데(이사야서 45장) 쿠로슈의 후손이 이룬 나라가 오늘날 이란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으르렁대고 있으니 역사의 부침이 참으로 미묘하다.

현대 중동 이해할 열쇠는 이란혁명

오늘날 이란과 이스라엘뿐 아니라 중동 국가 간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은 1979년 이란혁명이다. 미소 냉전시대에 페르시아만을 사이에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튼튼한 친미 쌍둥이 기둥을 이루었던 이란을 친미 세속왕정에서 반미 이슬람 공화정으로 바꾼 대변혁이다. 동쪽(소련 공산주의)도 서쪽(미국 자본주의)도 아니라 이슬람으로 국체를 바꾼 이란혁명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 법학자들이 직접 정권을 잡은 전대미문의 체제다.

이슬람 역사에서 이슬람 법학자는 강력한 무력을 지닌 통치자와 주민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1979년 이란에서는 직접 통치자가 되었다. 이란의 국가원수는 이슬람 법학자인 최고지도자다. 국민이 직접 뽑은 88명의 이슬람법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의회에서 종신 최고지도자를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으로 선출하지만 국가 서열 2위로 행정부 수반에 불과하다. 군 통수권은 최고지도자가 쥐고 있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국가원수인 이란의 이슬람공화정을 개혁파 하타미(Khatami) 전 대통령은 '영성(靈性)을 갖춘 민주주의'라고 자랑스러워 한다.

오스만제국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제국의 영토에서 벗어나 서구가 그은 국경선에 따라 보호령으로 시작한 중동의 여러 아랍국가는 서구의 압도적인 힘에 눌렸다. 전통적인 삶의 기반과 사회체제가 서구식 근대화 체제로 바뀌며 무너져가자 이슬람을 앞세워 전통의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이 운동을 시작했다.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때 아랍 산유국들은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국가에 석유수출을 거부하며 발생한 제1차 석유파동을 통해 자원민족주의로 서구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6년 후 이슬람식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이란혁명에서 확인했다. 이란혁명 이전에는 여러 국가로 나뉜 아랍의 단결을 주창하는 아랍민족주의가 중동을 휩쓸었다면, 이란혁명 이후로는 이슬람주의가 중동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1979년 전까지 이란과 이스라엘은 친미국가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란은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반대했고 이스라엘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무슬림 국가로는 터키에 이어 두번째로 이스라엘의 독립(1948년)을 승인했다(1950년).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두고 아랍국가들과 사투를 벌였는데, 이란과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상호협력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원유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했다. 또 군사 및 정보협력도 긴밀하게 유지했고, 공동 미사일 개발 계획까지 추진했다. 당시 이란에는 8만명에 이르는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

이라크 핵시설 공격 땐 서로 공조

1979년 이란혁명으로 양국의 우호 관계는 끝났다. 이란은 주테헤란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그 열쇠를 이스라엘에 대항해 싸우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 아라파트에게 주었다. 이스라엘로서는 참기 힘든 모멸적 조치였다.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는 "친미 친이스라엘 이란 왕정 때문에 이란이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기지로 변했다"고 비판했다. 이란혁명의 구호는 '억압받는 자를 해방한다'였는데 왕정의 독재에 고통받는 이란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시온주의자들에게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압제에서 해방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혁명 직후인 1980년 9월 이웃 이라크의 침략으로 8년 동안 전화에 휩싸이면서 이란과 이스라엘 관계는 적대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더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했던 이라크의 힘을 빼기 위해 이란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이란은 시온주의자들이 제공한 무기로 이라크와 싸운 것이다.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바그다드 남동쪽에서 은밀히 오시락(Osirak)이라고 부른 원자로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란은 후세인이 핵무기로 이란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 폭격을 시도했다. 이라크의 핵무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스라엘은 핵 관련 정보를 이란으로부터 넘겨받아 결국 오시락 원자로를 완파했다. 당시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미국을 '큰 사탄',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불렀는데, 이라크 핵 제거를 위해 작은 사탄의 공군이 유사시 이란의 타브리즈(Tabriz) 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로 이라크 핵시설 파괴는 양국의 중요한 공통 관심사였다.

양국 관계는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 재임기(2005~2013년)에 급격히 악화됐다. 혁명수비대 출신 강경파인 아흐마디네자드는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없애버리겠다"는 섬뜩한 발언을 했다. 이는 당시 이란의 핵개발 의혹과 얽혀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다.

이라크와 전쟁 당시 이란은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의 카르발라 수복을 목표로 하면서 궁극적으로 카르발라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정예 부대인 '고드스'(Qods)는 바로 예루살렘을 뜻하는 말이다. 이란의 지향점을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표징이다.

2003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이란은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을 불편하게 만드는 친이란 정권과 군사조직을 탄탄하게 구성했다. 이라크에는 친이란 시아 민병대, 시리아에는 친이란 시아파 아사드(Asad) 정권, 레바논에는 1982년에 만든 반이스라엘 시아파 헤즈볼라(Hezbollah)가 자리잡았다.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가 우려하던 '시아초승달' 모양의 이란 세력권이 아랍지역에 완성된 것이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Hamas)와 이슬람 지하드(Islam Jihad)는 순니지만 이란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 남부 예멘도 이란의 후원을 받는 시아파 후시(Houthi) 반군이 장악한 상태다. 이란이 촘촘하게 짜놓은 세력 판도 모양이 시아초승달이 아니라 마치 시아보름달 같다.

외교뿐 아니라 문화 체육에서도 불인정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이 핵무기라도 갖는다면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 아랍 국가들 역시 상상하기 싫은 악몽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과학자들을 암살하고,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상을 파기하도록 전방위적 외교를 펼쳤던 이유다.

현재 이스라엘이 실존적 위협을 느낄 국가는 중동에서 이란뿐이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지 않고자 철저하게 노력한다. 외교뿐 아니라 문화 체육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다. 일례로 세계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레슬링 선수는 다음 경기에서 이스라엘 선수와 만나는 것을 피하고자 자신이 우세한 시합에서 일부러 지기도 했다.

쿠로슈의 후손과 쿠로슈가 해방한 사람들의 후손이 2500년 후 펼치는 애증의 관계를 보며 역사의 무상함을 느낀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