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기업가정신 상징 … 오일쇼크·조선불황 극복

지난 1월 13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한국의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합병을 거부한 이유로 LNG운반선 시장에서의 강력한 지배력을 이유로 꼽았다. 1972년 울산 미포만의 모래사장에 건설한 현대중공업이 지난 50년간 이룩한 성과와 함께 그 앞에 닥치고 있는 도전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다. 디지털전환과 탈탄소시대에 적응하고 생존할 과제도, 산업재해 극복과 인권경영의 과제도 해결해 가야 한다. 내일신문은 현대중공업 50년을 △기적의 50년 △산업재해 50년 △앞으로 50년으로 구성해 살펴본다.

현대중공업그룹 아비커스와 SK해운이 2일 자율운항으로 대형 상선의 대양횡단에 성공했다. 선장과 항해사들이 아비커스의 자율운항시스템(하이나스 2.0)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현대중공업그룹 제공


현대중공업그룹(HD현대)이 세계 LNG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룹 조선부문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은 지난 23일 노르웨이와 영국 선급으로부터 차세대 LNG연료공급시스템(Hi-eGAS)에 대해 기본설계 인증을 받았다고 밝혔다. LNG추진선의 연료공급과정에서 버려지는 열을 재활용하는 이 시스템을 통해 이전에 비해 연료소모와 탄소배출량을 각각 1.5% 줄일 수 있다.

LNG추진선은 기존 선박 연료인 벙커C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선박보다 황산화물(SOx)을 99%, 질소산화물(NOx)은 85% 이상 줄일 수 있어 글로벌 환경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친환경 선박으로 각광받고 있다.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1분기 세계에서 발주된 선박의 60% 가량이 LNG추진선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2일 그룹 자율운항 전문회사 아비커스는 SK해운과 18만㎥급 초대형 LNG 운반선 '프리즘 커리지'호의 자율운항 대양횡단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발표했다. 이 선박에는 아비커스의 2단계 자율운항 솔루션인 '하이나스2.0'이 탑재됐다. 아비커스에 따르면 이번 항해는 자율운항 기술로 선박을 제어해 대양을 횡단한 첫 사례다.

◆LNG운반선 이어 추진선 선도 = 현대중공업그룹은 1990년대 세계 LNG시장에 등장했다. 현대중공업은 한국가스공사(KOKAS)의 LNG 장기 도입 계획에 따라 1991년 6월 12만5000㎥급 모스형(갑판 위에 둥근 화물탱크를 설치) LNG 1호선 건조계약을 운항사인 현대상선(HMM)과 체결하고 1994년 6월 인도했다. 한국조선소로는 최초다. LNG선 개발에 착수한 지 14년 만이었다.

1999년에는 첫 해외 수주에 성공하며 세계 LNG운반선시장에 데뷔했다. 2007년 11월에는 21만6000㎥급 초대형 LNG선을 세계 최초로 탄생시켰다. 미국 OSG사로부터 수주한 이 선박은 이전 40여년간 전 세계 LNG선 추진기관으로 사용되던 스팀터빈엔진보다 효율이 40% 이상 뛰어난 디젤엔진을 장착했고, 재액화 장치를 갖췄다.

2007년 6월 국내 최초로 전기추진방식 LNG선을 건조한데 이어 2016년 9월 고성능 가스엔진 추진 방식의 LNG선을 인도하는 등 스팀터빈, 전기추진방식, 디젤엔진추진방식, 가스엔진추진방식 등 4가지 타입의 LNG선 건조 기술도 모두 갖췄다.

지난해 한국은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 운반선 78척 가운데 68척(87%)을 수주했고, 현대중공업그룹 조선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32척을 수주하며 세계 1위 위상을 다시 확인했다.

한국조선해양은 엔진에 LNG 연료를 공급해주는 연료공급시스템, 외부 열유입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증발가스를 다시 액화시키는 재액화설비 등 LNG 운반선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기술을 두루 갖추고 있다.

LNG추진선 역시 현대중공업의 강점이다. 한국조선해양은 지난해 수주한 선박 221척 가운데 절반 가량을 이중연료엔진이 탑재된 친환경 선박으로 수주한 데 이어 지난 4월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96척의 LNG 추진선을 수주했다.

2018년 7월엔 세계 최초로 LNG 추진 대형 유조선을 인도했고, 2020년 9월에는 세계 최초의 LNG 추진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인도하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오일쇼크 극복하며 세계 1위 등극 = 현대중공업그룹은 창업 이후 세계 경제를 뒤흔든 두차례 오일쇼크를 뚫고 세계 1위에 올랐고, 연이어 닥친 조선불황을 극복하고 세계 조선산업를 선도하고 있다. 현재 공급망 위기와 세계적 고물가 시대를 극복해야 하는 기업들이 참고할 수 있는 위기극복의 경험을 쌓았다.

1972년 3월, 울산 미포만에 조선소 건설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세계 조선경기는 호황국면이었다. 하지만 1973년 말 제 1차 오일쇼크로 세계 해운, 조선경기는 냉각됐다.

오일쇼크로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수주가 끊긴 1974년 중반부터 현대중공업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대형선 위주에서 다목적 화물선, 벌크선, 목재운반선 등의 중·소형선 건조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수주선종을 다변화시켰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했다. 우선 조선 관련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1974년 7월 울산철공주식회사(현 한국프랜지) 설립을 시작으로, 1975년 1월 조선소 내 철구사업부(해양플랜트사업본부)와 4월 수리조선소(현대미포조선)를 설립하며 품질관리(QC), 생산성 향상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전체 선가의 10~15% 이상을 차지하는 엔진 생산을 위한 준비 작업도 시작, 1976년 7월 정식으로 엔진기계사업본부를 발족하며 본격적인 엔진생산에 돌입했다. 1977년에는 철구사업부를 플랜트사업본부로 이름을 바꿔 발전설비, 산업기계, 화공설비, 담수설비 등의 생산에 나섰다.

일련의 노력은 1978년도 제2차 오일쇼크 때에도 계속 강화했다. 1978년 2월엔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에서 '현대중공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고 해양개발사업부 등을 신설, 사업다각화를 통한 대형공사 수주에 총력을 기울였다. 1983년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의 10.7%인 210만톤(G/T) 상당의 선박을 신규 수주하고, 14억달러 수출액을 기록하며 설립 이후 최대 실적을 올렸다.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10억달러 수출탑도 수상했다. 현대중공업은 이 해에 이룬 생산증대를 바탕으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건조량 기준) 조선업체로 부상했다.

하지만 1983년 세계 조선 1위였던 현대중공업도 바로 불황을 맞았다. 1985년은 선박 가격이 80년대 초 절반 수준에 그쳐 조선시황 최악의 해로 기록됐다. 현대중공업은 1983년 양적 팽창이 정점에 달한 순간 경영합리화에 착수하며 질적 전환을 모색했다. 해양개발과 플랜트, 엔진, 로봇, 중기계 등 비조선 부문으로 진출해 경영 다각화 기반도 다졌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주도한 자부심 = 현대중공업은 조선소를 준공하던 해에 국내 최초로 1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이후 매년 70~80%의 수출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는' 모델이다.

지난 1991년에는 20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2005년 70억달러, 2007년 100억달러, 2009년에는 조선·중공업계 최초로 150억달러탑을 수상했다.

해외선주에게 주문을 받아 국내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해 수출한 현대중공업은 창립 이후 '수입대체형 공업화'가 아니라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리드하며 한국경제 성장과 함께 했고, 후발국이나 개발도상국에도 경제성장의 길을 제시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은 국제경쟁력을 강조했다. 그는 "1940년대의 아르헨티나,

1950년대의 인도, 1960년대의 브라질, 1970년대의 멕시코가 모두 수입대체형 공업화전략으로 거의 선진국 문턱까지 갈 수 있었지만 국내 시장을 상대로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앞서가는 선진국 기술에 대항하지 못 하고 끝내 모두 좌절하고 말았다"며 "어느 나라건 산업의 국제경쟁력 없이는 그 나라 경제는 유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1992년 발행 현대중공업사)

현대중공업은 처음부터 세계 제일을 추구했다. 당시 조선산업을 선도하고 있던 일본의 어느 조선소보다 더 큰, 세계 제일의 생산능력을 갖춘 도크를 계획해 세계 조선사상 처음으로 배와 도크를 동시에 완공했다. 초기 일본과 합작을 시도했지만 일본이 경영에 간섭하려 하고 생산규모도 한국경제 규모를 고려해 5만톤급 선박을 만들 시설이면 충분하다고 해서 노선을 바꾼 것이다.

정 회장은 "외국과의 합작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정신"이라며 "우리가 그때 일본이 제시하는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면 우리 경제는 기껏 섬유나 수출하고 중화학공업 일반에서는 수입대체형 공업화를 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고 국력을 집중했지만 기업이 각고의 노력을 안 했다면 정부의 의지나 수출지원체제가 아무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현대중공업사) 현대중공업이 일군 기적의 50년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현대중공업 창립 50년" 연재기사]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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