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동남아에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그리고 말레이시아까지 썩 만족스럽진 않아도 민주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국가가 네 나라나 되는데, 필자가 글의 제목을 '동남아 정치체제의 대세 선거권위주의'로 지은 것에 반론이 나올 수도 있다. 게다가 싱가포르를 권위주의라고 단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는 동남아전문가나 정치학자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태국과 캄보디아는 지난 10년 사이 군부개입과 개인지배로 독재정치가 크게 강화됐는데 선거가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남아 여러 나라의 체제들을 시공간적으로 비교해 보면 '선거권위주의'가 동남아적 정치체제의 이념형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정치체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결국에는 이 유형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벡터의 중심에 선거권위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느낌이다. 지구촌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 낙관론이 지배하던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전세계가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20년대 아시아의 현실은 선거로 포장된 권위주의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화한 세 나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조차 '민주주의의 질'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세 나라 모두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이 제대로 보호·보장되지 않고, 소수의 엘리트가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는 '과두제'로 시름한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선 포퓰리스트 대통령이 등장한 데다 코로나19 위기가 터지면서 민주주의는 확연하게 후퇴했다. 건국 59년 만에 첫 정권교체를 경험한 말레이시아는 '민주적 공고화'는 차치하고 민주주의 '이행'이 완료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정치학자들조차 설명 포기한 싱가포르

이에 비해 싱가포르 태국 캄보디아는 확연한 권위주의 체제이지만 동시에 선거를 '중시'하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권위주의라고 해서 모두 같은 체제는 아니다.

민주주의와 달리 권위주의는 외연이 매우 넓고 내포가 작은 개념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들 세 권위주의체제가 공유하는 합집합의 크기는 극히 작다. 정치 영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광범한 자유와 다원주의적 가치가 허용된다는 점, 선거를 제외하고는 정치참여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 집권세력이 자유민주주의에 반감을 갖는 등 권위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 공통점이다. 또 세 나라가 공히 '선거를 중시한다'고 했는데, 선거라는 제도와 과정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고, 선거결과에 '민감'해 선거제도와 과정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정도의 의미다.

싱가포르는 흔하게 쓰지 않는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어울리는 묘한 나라다. '별난' '예외적인'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기적적인' 나라라고 해도 말이 되고, 어떤 부정적인 형용사들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다.

싱가포르는 인류 역사에서 어떤 나라도 하지 못했던, 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럼없이 해내고 있다. 사회를 원하는 대로 디자인하고, 디자인한 설계도대로 만들어가는 사회공학적인 나라가 싱가포르다.

정치 영역에서도 하도 독창적인 디테일들이 많아, 정치학자들이 만든 보편적 개념과 분석틀에 집어넣기가 곤란한 나라다. 결국 분석과 설명을 포기하고 "싱가포르는 예외적"이라고 결론 내리는 학자들이 많다(싱가포르 예외주의).

선거제도에서도 독창적이고 이색적인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선거구 크기를 보면, 일인선거구(SMC)와 집단대표선거구(GRC)를 섞어 한 선거구에서 1명 또는 3~6명을 뽑는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적극적 소극적 요건 12가지를 충족해야 한다(헌법 제44조, 제45조).

의회제 하에서 상징적 지위만을 가진 대통령의 자격은 여기에 10여가지 요건을 더 추가해 놓았다(헌법 제19조, 20조), 이 모든 자격요건을 충족하는 대통령 후보를 찾을 수 없어 선거 때마다 애를 먹는다.

싱가포르 헌법은 아마도 가장 구체적이고 복잡한 것 같다. 싱가포르정부와 집권여당이 이런 헌법을 만든 명분이나 구실이 어떠하든, 헌법과 헌법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한 제도들이 반대파와 야당에 불리하게 작용해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의 장기집권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의회제를 채택한 싱가포르에서 PAP는 총선을 실시한 이래 60년 동안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게다가 1968년 선거부터 4차례 총선에서 전 의석을 휩쓸기도 했다. 최근 2020년 총선에서 제1야당 '노동자의당'이 처음으로 10석을 얻는 '대승'을 거뒀지만, 총의석 93석 중 겨우 10.8%를 차지했을 뿐이다.

독재와 민주주의 양극단 오가는 태국

태국은 1932년 절대왕정폐지(민주혁명) 이후 모두 21번 헌법을 개정했다. 현재 22번째 개정을 둘러싼 정쟁이 한창이다. 대부분 군사쿠데타와 민정이양의 후속조치로 헌법이 개정되었으니 정변도 그만큼 잦았다는 말이고, 헌법 개정의 수위도 대부분 제정 수준 정도로 매우 높았다. 정치의 추가 독재와 민주주의 양극단을 요동치며 오간 게 태국 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군정과 민정이 반복되고 간간히 선거에 의해 민주정부가 구성되긴 했지만, 태국 현대정치는 군부와 친군부 정당이 중심축을 이루고 국왕이 묵인 내지 후견하는 권위주의에 지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소득수준이 동남아에서 상위권에 속하고 동남아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대국이 된 것은, 비정치적 분야에 광범하게 허용되고 확산된 자유와 다원적 가치 덕분이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태국의 정치와 사회가 친탁신-반탁신, 농촌-도시, 북부-남부로 갈라지기 이전에는 정치적 격변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흔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일당독재 전체주의 문턱에 선 캄보디아

캄보디아는 선거권위주의라는 체제적 성격을 빼고는 위의 두 나라와 함께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 없는 나라다. 지속적인 권위주의화로 민주적 속성을 상실하고 일당독재, 전체주의의 문턱에 서있다.

훈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1993년 실시된 내전종식 후 첫 자유선거에서 의석률 42.5%(득표율 38.2%)를 기록하며 제2당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1998년 선거에선 52.5%(41.4%)로 제1당으로 부상하고, 이어 2003년 59.3%(47.3%), 2008년 73.2%(58.1%)에 이르기까지 집권정당의 지위를 꾸준히 굳혔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야당과 그 지지자들에게 테러 폭력 협박 회유 등 물불을 가리지 않은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2013년 선거에서 야당 캄보디아구국당(CNRP)이 55석과 44.5%의 득표율로 68석, 48.8%을 획득한 CPP를 바짝 쫓아가자, 훈센은 CNRP 지도부에 온갖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2017년 아예 정당을 해산시켰다. 이듬해인 2018년 실시된 마지막 선거에서 CPP는 19개 군소정당과 겨뤄 총득표율 76.9%로 125석 전부를 싹쓸이했다.

비록 세 나라의 정치가 아무리 권위주의적이라 할지라도 선거는 체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국민과 야당,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해 싱가포르는 자신의 체제도 민주주의라는 점과 세계 최고 수준의 정책과 복지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절대적이라는 점을 선거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그래서 선거에서 과반의 지지에 만족하지 않고 압도적 지지를 받기를 원한다.

태국 정치에서 선거는 군부쿠데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정치변동 수단이자 경로다. 선거를 없애면 군부개입의 명분도 사라지게 된다.

동남아 최빈국 캄보디아에서 선거가 주목받게 된 것은, 선거가 비극적인 내전을 대체했다는 공적을 국민들이 인정하고, 그 과정에 국제사회의 역할과 관심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2018년 선거가 만들어낸 일당체제가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