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동남아 국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선거에 목을 매는 건 사실이지만, 선거 과정과 결과만으로 드러나는 정치는 일면에 불과하다. 전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도래가 시간문제로 보였고 동남아에도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쳤던 20세기 말에도 정치리더십은 여전히 중요했다.

특히 정치양분화가 극대화되고 포퓰리스트 스트롱맨 지도자가 풍미하는 이 시대는 리더십의 성격과 능력에 따라 한 나라의 운명과 국제질서가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호치민 수카르노 리콴유 시아누크 사나나구스망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빼놓고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캄보디아 동티모르의 독립과 건국을 논의할 수 없다. 네윈 수하르토 폴포트 마르코스 마하티르가 미얀마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현대사 속에서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과 퇴보, 성장과 위기, 통합과 분열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다.

제도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집단적인 리더십을 구축한 미얀마와 태국의 군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패권적 집권여당, 베트남과 라오스의 공산당, 동티모르의 지도자집단도 똑같이 중요하다.

동남아 정치에서 리더십의 존재가 좀더 부각되는 것은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다. 왕과 지도자를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 우주의 질서를 구현, 재현해야 하는 임무를 진 절대적인 존재로 보는 힌두불교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았던 곳이 동남아다.

인도문명의 영향이 직접적이지 않았던 베트남이나 필리핀은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 외세의 침공 점령 식민지배가 민족적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브루나이 라오스 베트남 같은 나라는 선거가 무의미해서 리더십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극소수의 지배층과 압도적 다수의 농민이라는 사회구조 속에서 자율적인 계급과 집단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동남아의 사회경제사적 전개과정에서 답을 찾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식민통치와 세계대전 내전 냉전 빈곤 자연재해 경제위기를 다 겪은 동남아의 근현대사는 난세 중의 난세가 아닐까?

필리핀 대선을 마지막으로 내년 상반기까지 동남아에 선거는 없다. 때맞춰 동남아의 지도자와 리더십을 중심으로 동남아정치 이야기를 계속할까 한다. 그런데 선거의 역사보다 길고, 선거의 양상보다 다양한 것이 동남아의 리더십이다 보니 논의 범위를 다소 좁혀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우선 근대이전의 리더십은 제외하고, 동남아 각국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큰 임팩트를 준 최고지도자만 살펴볼까 한다.

그러고 보니 모두 지난 100년 사이 활약한 인물들이다. 동남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도자 호치민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호치민은 어떤 지도자보다도 과오가 적다.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건국 후 혁명적 개혁을 했고, 프랑스 미국과 30년이나 전쟁을 했으니 과오가 없을 수 없다. 혁명 과정에 수백수천의 지주들이 처단되는 걸 막지 않았다. 또 베트남전쟁은 당연히 동족살상을 수반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호치민을 살인마 전쟁광으로 몰아가려는 여론전은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앞서 공산주의혁명에 성공한 소련과 중국에서 숙청, 강제이주, 정책적 과오로 수천만명이 희생된 것과 식민통치와 전쟁 중에 프랑스와 미국이 저지른 만행에 비하면 북베트남의 잘못은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논쟁이 있긴 하지만 호치민은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혁명동지들과 베트남인들에게 끊임없이 증명해 보였다.

호치민은 유학자 집안에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계 명문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생시절 농민시위에 연루돼 학교에서 제적되는 것을 시작으로, 영국과 중국 국민당정부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고, 프랑스 식민지정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 등 30년의 망명생활 중 절반은 경찰을 피해 은닉, 도망하고 투옥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호치민의 명성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1919년 28세의 나이로 베트남해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베르사이유평화회의에 제출해(거절을 당했지만) 큰 주목을 받았다. 1920년 프랑스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24년 1월 사망한 레닌을 애도하는 명문 추도사를 프라우다지에 실어 이름을 알렸다. 그때부터 1943년 코민테른이 해체될 때까지 동아시아나 동남아 대표를 맡았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과 혁명, 이후 건국의 근간이 되는 조직들을 만든 주역이었다. 베트남혁명청년협회(탄니엔) 베트남공산당 인도차이나공산당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창설했다.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수립되자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베트남은 50년에 걸친 항불·항미 독립운동과 통일전쟁 중에서도 권력투쟁이 적었다. 호치민의 능력과 명성에 도전할 경쟁자가 있을 수 없었다. 외세의 지원과 권력투쟁을 통해 최고 지위에 올랐던 김일성이나 이승만과는 경우가 크게 다르다.

호치민은 여러 이름으로 살았다. 가명이 160개였다는 설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알려진 이름만 해도 응웬신꿍 응웬땃타인 응웬아이 투옹 리투이 박호(호아저씨), 그리고 끝까지 사용한 가명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있다. 무려 30년 동안 망명객으로 해외를 떠돌다 보니 신분 세탁과 위장이 그만큼 필요했을 터다.

호치민은 프랑스 영국 미국 망명생활 중 양반출신 망명객들이 정장을 하고 점잖게 운동을 했던 우리 경험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갖가지 '미천한' 직업에 종사했다. 21살의 나이에 증기선을 타고 프랑스로 나가면서 얻은 주방보조일을 시작으로 요리사 제빵사 식당화부 접시닦이 웨이터 등 식당일은 안해 본 게 없을 정도고 청소부 견습공 공장노동자 정원사와 자동차 영업사원, 사진사, 부잣집 집사, 통역과 번역사, 심지어 무용수까지 했다고 한다.

좀더 어울리는 것은 출국하기 전 사이공에서 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친 것과 1920년대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서 강의한 경력이다.

프랑스 중국 미국에 가장 오래 머문 이유

당시의 제3세계 지도자들 중에 호치민만큼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거주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비행기 여행이 불가능하던 시절에 증기선을 타고 전세계를 누볐다. 프랑스와 미국 영국 소련 중국(광저우와 홍콩) 태국에선 거주하거나 장기 체류했고,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여행했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태국어 중국어, 그리고 광동어와 다른 중국어 방언들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호치민이 30년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프랑스 중국 미국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세 나라가 베트남을 가장 심하게 괴롭힌 나라들이고, 베트남은 결국 이 세 나라의 침략을 모두 물리쳤다. 호치민은 적들에 대해 속속들이 배웠던 것이다. 호치민이 남긴 정신적 유산과 베트남인들의 끈기는 전쟁이 끝난 후 더욱 빛났다.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은 미국을 무려 20년간이나 달래고 구애해 1995년 단교와 봉쇄의 빗장을 푸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6년 뒤에 올 승전과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독신으로 소박하게 살았기에 유족 재산 유품 등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죽으면 화장한 뒤 재를 삼등분하여 남부 중부 북부에 뿌려달라'는 호치민의 유언을 베트남정부는 지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지도자 호치민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방부처리된 호치민의 시신은 바딘광장에 마련된 호치민묘에 아직도 안치되어 있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