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동남아시아 연구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고약한 질문 하나가 있다. "왜 동남아는 민주주의가 안되는가?" 평범한 질문인데 평생을 동남아 정치에 천착해온 필자도 별 수 없이 말문이 막힌다.

동남아의 민주주의 결핍 요인들을 따져보기 전에 그 '현상'을 정리해 보자. 동남아 지역의 정치체제는 5개의 권위주의, 2개의 선거권위주의, 4개의 민주주의로 구성돼 일견 정상 분포된 듯 보인다. 하지만 동남아 독재체제들의 낮은 민주화 가능성과 높은 억압성의 정도, 4개 민주체제들의 낮은 질적 수준과 미완의 공고화를 고려하면 동남아는 권위주의와 훨씬 더 친숙한 편이다.

근대화론 개발독재론은 동남아와 안맞아

동남아의 권위주의적 성향에 관해서는 연구가 많다. 아직 동남아의 사회경제적 발전수준이 민주주의를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는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은 진부하기는 해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동남아의 저소득국가인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CLMV)이 세계 정치체제 지도의 가장 어두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낮은 생활수준과 빈곤 탓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석유부국 브루나이왕국과 아시아 최고부국 싱가포르가 민주화되지 못한 건 이슬람국가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예외라고 치자. 하지만 중상위 소득국 태국이 군부개입으로 민주주의 근간이 흔들리는 반면, 가장 못사는 동티모르가 벌써 20여년째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걸 보면 '잘살아야 민주주의를 한다'는 근대화론은 적어도 동남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이런 거시적인 설명은 어떻게 보든 지나치게 원론적으로 들린다.

역사학자들과 비교사회학자들도 거시적 관점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의 분석은 좀 더 동태적이라 흥미롭다.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쟁취한 서유럽과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비교해 찾아낸 이들의 설명방식은 도시에서 출현, 성장해 정치적 자율성을 획득한 중산층(부르주아지)이야말로 안정적인 민주주의의 견인차요 지지대라는 것이다. 비교사학자들의 키워드는 봉건제 자본주의 도시 계급 등인데, 이런 요소를 겸비하지 못했던 동남아의 근현대사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성과물을 산출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민주주의 기원에 관한 비교사적 분석은 지나치게 유럽중심적이라 동남아뿐만 아니라 비서구 지역 전반에 적용할 여지가 크지 않다. 그래도 '정치적으로 자율적인 중산층'은 동남아의 민주화에 꼭 필요한 핵심 요소이다.

이들보다 덜 거시적이고 덜 구조적이면서 '대중적' 인기가 많은 설명은 흔히 개발독재론이라고 부르는 정치경제학적 설명이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 기술 노동 인프라건설이나 각종 정책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이는 강한 국가나 독재자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개발독재는 어느 정도 경제성장에 성공한 단계에서 등장하는데, 개발독재론의 좌파 버전인 종속적발전론은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대규모 외국자본을 필요로 하고, 매판적인 독재체제가 정치화된 노동세력과 포퓰리즘을 억압함으로써 외국인투자자들에게 투자신인도를 높여준다는 주장이다.

음모론에 가까운 이런 분석은 동아시아와 남미의 신흥공업국 현상과 민주주의 붕괴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예측해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적이 있지만, 동남아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개발을 핑계 삼아 독재를 했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와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결과적으로 나라를 재정, 통화위기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고, 대륙부의 독재벨트 CLMV의 일당독재 군부독재의 명분은 안보일 뿐 개발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한 권력' 관념 오늘날까지 영향

이런 저런 설명들이 석연치 않다면, 동남아의 권위주의 친화성은 또 다른 어떤 요인들로 수정 또는 보완 설명되어야 할까. 필자는 '동남아산책' 연재를 시작하는 머리말에 정치과정(선거), 정치리더십과 아울러 정치문화를 들여다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치문화를 그냥 뭉뚱그려 이 나라의 정치문화는 이렇다, 저 나라의 정치문화는 저렇다고 단정하고 비교하는 것은 개념적 논리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래서 필자는 동남아 각국의 엘리트집단들, 구체적으로 군부 왕족 정치인 관료 기업경영인 지방유지 지식인집단 등이 드러내는 '하위' 정치문화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고전시대는 물론이고 민주화를 다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남아는 엘리트집단의 영향력이나 권력이 압도해 다른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도전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남아에서 정치체제의 성격과 변동을 따진다면, 권위주의에 대한 책임이든 민주화에 대한 성과든 주로 엘리트집단의 공과가 될 수밖에 없다.

전통 동남아사회는 다른 문화권만큼 신분제나 카스트가 고착화, 계급서열화되지는 않았으나, 엘리트(왕족과 관료)와 대중(농민과 평민)의 구분만은 뚜렷했다. 고전시대 왕은 신격화되어 절대적 존재로 추앙됐고, 왕의 권력은 신성시되어 평범한 인간들이 넘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비록 합법적 폭력성을 내용으로 하는 세속적 권력을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신성한 권력' 관념은 절대왕정이 사라진 현대까지 이어져 오늘날도 권력은 국가와 엘리트들로 집중되고, 이들이 대중들로부터 맹목적이거나 암묵적인 지지와 복종을 이끌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무시되고 배제된 평민

농민을 주된 생산계층이자 평민(백성)들 중 핵심으로 인정하던 유교사회와 달리, 동남아 전통사회에서는 농민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사회적으로 무시했다. 칼 마르크스가 계급의식을 결여한 농민을 '포대속의 감자'로 조롱했던 것처럼, 동남아의 엘리트들은 농민을 지식과 지혜를 갖추지 못한 '바보멍청이'(orang bodoh)로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엘리트들이 독점적 권력을 향유하면서 대중들을 조작과 동원의 대상으로만 삼는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동남아의 과거 역사와 현대 정치에서 두루 관찰된다.

수하르토 군부정권은 1966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 국민을 '물 위를 떠다니는 덩어리'(floating mass)로 규정해 정당의 접근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극단적인 풀뿌리 민주주의 고사작전을 펴기도 했다. Mass는 덩어리와 대중 두가지 뜻이 있다.

1932년 태국의 입헌혁명으로 집권세력이 왕족에서 관료집단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민들은 정치과정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관료정치'가 탄생했다. 1970년대 이후 태국의 민주화 운동으로 중산층을 넘어 농민계층으로 정치참여가 확대됐지만, 왕과 군부는 여전히 과도하고 시대착오적인 정치 개입을 계속하고 있다.

한때 동남아 전역을 광풍처럼 휩쓸었던 공산주의도 소수의 지식인 지도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지몽매한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동원'한 작전이었다.

필리핀 역시 1986년 '국민의 힘'(People Power)이 에드사(EDSA) 거리에 집결하면서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공언하지만, 독립 이전부터 의회 중앙정부 지방정치를 장악하기 시작한 200~300개의 '정치왕조'(political dynasties)들이 정실주의 금권정치 정치테러 소셜미디어를 통한 여론조작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영구적인 권력독점을 꾀하고 있다.

미얀마의 군부, 베트남과 라오스의 공산당, 캄보디아의 훈세인 일가, 인도네시아의 의회와 지방정부, 말레이시아의 집권정당연합, 브루나이의 왕족, 동티모르(티모르레스테)의 정치명망가들, 심지어 싱가포르의 파워엘리트에 이르기까지 동남아 정치엘리트들의 반민주적 정치문화는 실로 다양한 조직과 집단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