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동남아의 내륙부와 도서부 간 양분화 및 양극화 경향은 지난 10년사이 더 확연해졌다. 대륙부가 뚜렷한 권위주의화 추세를 보이는 반면, 도서부는 민주체제를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정치문화의 차이가 있다. 배제와 폭력의 대륙부 문화와 관용과 협의의 도서부 문화가 그것이다.

동남아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집권하기 위해 이념이나 종교를 포함한 상이하고 이질적인 차이를 넘어 상호협력하고 연대한다. 이같은 행위를 정치적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협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익공유를 위한 정당간 '야합'으로 볼 것인가. 사실 이런 정당 간의 협력을 야합으로 보는 부정적 정치윤리적 시각은 동남아인들의 전통적 정치 관념이나 인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남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정치를 엘리트들의 배타적 영역으로 간주해 그들 사이의 협력을 공동체적 목표나 가치문제와 연관짓지 않았다.

협치 야합은 도서부의 독특한 현상

물론 필자는 이런 엘리트주의적 관점이 더 이상 동남아정치의 변화를 설명하고 동태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민주정치이론에 따르면 다당제 하의 정당들은 집권을 위해 타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경우 정부구성에 필요한 최소의 의석수, 즉 과반수를 최소한으로 상회하는 의석수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을 맡은 (주로 제1)정당은 총 의석수의 50%에 해당하는 의석수 더하기 1석에 가장 가까운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파트너 정당을 구한다는 원칙이다.

역대 민주국가들이 이 최소승리연정 원칙대로 연립정부를 실제로 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최소연정이 정책결정의 효율성과 자원배분의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명확하다. 이 원칙에 비춰볼 때 민주화 이후 동남아에서 나타나는 '무분별한' 정당간 연합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며 공동체와 다수 성원의 이익을 해치는 정치적 행위라는 비판은 정당하다. 동남아의 민주정치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개혁적이지 못하고 과두제적 엘리트주의, 정당 카르텔화나 왕조정치로 흐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제도화되다시피 한, 대통령 선거 후 압도적 다수의 정당들이 압도적 다수의 의석을 합해 '최대연정'을 구성하는 경향은 민주주의의 최소승리연정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행적인 정치관행으로 보인다. 최대연정은 반대파를 약화시켜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는 장점은 있으나, 장기적으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하고 모순을 고착화 구조화한다.

선거연합 집권연합 최대연정과 같은 정당간 협력과 관련된 또 하나의 질문은 이러한 정치현상을 동남아 모든 국가의 보편적 현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앞선 글에서 필자가 예를 든 나라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이었다. 열흘 뒤인 5월 14일 총선을 치르는 태국을 제외한 세 나라는 모두 도서부에 위치해 광의의 말레이문화권에 속한다. 그렇다면 협치든 야합이든 이와 같은 정당 간 협력행위는 민주화 이후 도서부 동남아만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대륙부와 도서부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 드러나는 체제성격상의 차이라는 중요한 현상을 비교정치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남아 두 하위지역 간의 양분화 및 양극화 경향은 지난 10년사이 더 확연해졌다. 우선 양분화 경향을 보면 대륙부가 뚜렷한 권위주의화 추세를 보이는 반면, 도서부의 경우 말레이시아가 민주적 이행에 성공하고 나머지 기존의 민주체제는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다. 나아가 대륙부의 권위주의화는 그 추세가 매우 강해 민주적인 도서부와의 정치적 격차가 더 커지는 양극화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대륙부 동남아의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세나라는 20세기 마지막 10년을 '제3의 민주화 물결'로 장식했던 아시아의 정치적 수레바퀴를 되돌려놓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91년 이래 군부 쿠데타가 사라져 민주화의 희망에 부풀었던 태국은 2006년 15년 만의 쿠데타를 통해 정치무대로 복귀한 군부와 왕당파 세력들이 두차례나 총선 결과를 부정한 뒤, 군부독재를 지속해왔다.

1990년 이래 강력한 야당과 민주화 세력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 했던 미얀마 군부는 2020년 선거에서 참패하자 총선 무효화를 선언하고 시위대와 반정부 인사 수천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지르며 정치무대로 복귀했다. 캄보디아는 2017년 제1야당을 불법화하고 다음해 실시된 총선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면서 이웃 인도차이나 국가인 베트남과 라오스의 일당체제 그룹에 합류했다. 이렇게 5개국으로 구성된 동남아 대륙부는 완전한 독재체제 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면 도서부 동남아의 경우 왕가정치 팬덤정치 야합정치 등 '민주적 결함'을 갖고 있긴 하지만, 말레이시아가 최근 5년 사이 민주체제 대열에 합류하는 쾌거를 이룬 이래 총 6개 중 4개 국가가 선거를 통해 지도자나 집권정당을 바꾸는 민주정치를 실행하는 지역이 됐다. 선거에 진정성을 보이고 국민들의 국정만족도를 충족시키는 싱가포르의 민주주의 점수도 나쁘진 않다.

정치문화 차이가 도서부와 대륙부 갈라

필자는 동남아의 두 하위지역이 체제 성격에 있어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 이유로, 동일한 동남아 지역에 속하면서도 두 하위지역이 가진 결정적 차이 즉 정치문화의 차이를 주목한다. 배제와 폭력의 대륙부 문화와 관용과 협의의 도서부 문화로 양분된다.

민족구성을 보면 대륙부는 도서부에 비해 훨씬 더 동질적이다. 대륙부의 모든 국가는 과반이 넘는 다수민족과 많은 수의 소규모 소수민족으로 나눠져 있다. 소수민족을 강압적이고 동화주의적인 차별정책으로 다스렸다. 탈식민화 이후 다수민족은 항상 승자였고, 독식할 수 있는 권력과 자원을 독점했다.

반면 도서부는 수십, 수백개의 종족들이 공존하는 다원사회, 즉 복합민족사회로 구성된다. 대륙부와 같이 1개의 다수민족이 수많은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면서 한나라를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도네시아 헌법에 천명한 '협의를 통한 합의' 원칙은 말레이문화에서 나왔다. 극단적 다원사회인 인도가 '독재로 다스리는 게 불가능해 민주주의를 한다'는 말처럼, 훨씬 많은 수의 종족과 언어에다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도서부 동남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념은 민주주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민주주의가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두 지역의 역사를 봐도 대륙부는 침략 정복 지배로 점철된 민족 간, 국가 간 관계를 형성한 반면, 도서부는 전쟁이 빈번하긴 했어도 규모나 양상이 판연히 달랐다. 토지와 자원이 풍부하고 인력과 노동력이 희소했던 도서부는 영토확장을 위해 대량살상 전쟁을 벌일 동기가 강하지 않았다. 도서부에는 말레이족과 무슬림들이 건설한 상업적 도시국가와 자바족이 건설한 농업기반의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강성했을 뿐, 크고 작은 민족들이 만든 국가가 공존했고 대륙부 민족국가들처럼 지역패권을 다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만든 민족주의와 국가 폭력성

대륙부는 평화적인 공존이 아닌, 항존하는 전쟁과 전쟁 위협 속에 놓인 국가들의 무대였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과 역사적 경험은 대륙부 국가들에게 두가지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강력한 민족주의와 국가폭력성이 그것이다. 대륙부 국가들은 독립운동 내전 지역분쟁 냉전을 거치면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두 가지 성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종족 종교 신분 이념까지 중첩된 갈등구조는 대륙부 국가들 간에, 국내 정치적 집단들 간에 경쟁과 폭력을 부추겼다. 미얀마와 태국, 태국과 캄보디아, 캄보디아와 베트남 사이를 갈라놓은 뿌리깊은 적대감과 증오심을 지역통합기구인 아세안이 간신히 막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나라 내부를 들여다보면, 대륙부의 국가들은 절대주의적 가치관의 바탕 위에 물리적 폭력성을 수단으로 정치적 이념적 반대자, 소수민족, 종교적 소수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강력하게 통제하는 독재체제를 이 시대에도 유지하고 있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