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 인천대 교수,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지금 도처에는 북방정책의 성과가 인태전략의 깃발 아래 서서히 침식돼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상황에 따라 잠시 멈추거나 우회할 수는 있어도 한순간을 살자고 극동으로 연결된 북방협력의 다리를 우리 손으로 끊지는 말아야 한다.

9월이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극동연방대학에서 동방경제포럼이 열린다. 올해로 8회차다. 코로나 사태로 2020년 한해만 건너뛰었을 뿐 우크라이나전쟁이 시작된 지난해에도 중단 없이 개최됐다. 다음달 10~13일로 예정된 8차 동방경제포럼의 슬로건은 '협력, 평화 그리고 번영을 향한 길'이다. 러시아 역사협회가 주관하는 본회의에서 다뤄질 핵심 주제는 '동방의 식민주의와 그것이 현대 세계에 미친 영향'이다. 식민주의 유산 극복을 전면에 내건 러시아는 '서구 중심의 단극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제재가 부당하며, 다극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함'을 역설할 것으로 전망된다.

동방경제포럼은 2012년 9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극동 개발과 신동방정책 추진을 계기로 출범했다. 2007년 APEC 정상회의를 유치하면서 그해 11월 수립된 극동개발전략은 이후 세차례(2011, 2013, 2020년)나 개정됐지만, '극동지역의 경제성장 및 기술발전의 가속화' '극동지역 주민 생활수준의 근본적인 개선'이라는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극동, 한일 비중 줄고 중국이 압도적 1위

과연 러시아의 극동 개발과 신동방정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극동의 사회경제지표의 변화를 살펴보자. 2022년 러시아 전체의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대비 2.1% 감소한 반면 극동의 지역총생산은 0.6% 감소에 그쳤다. 생산감소 위기를 비교적 잘 방어했다. 역설적으로 고정자본 투자가 증가했고, 교통물류 건설 농업 부문의 성과가 좋았다. 2022년 건설 부문의 생산은 주택건설 확대에 힘입어 전년보다 7.9%, 농업 생산은 무려 11.3% 증가했다.

그러나 사실 공업생산의 충격은 꽤 컸다. 4.8% 감소했다. 러시아 평균이 0.6% 감소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충격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에서 극동의 비중은 대략 5.3~5.5%이지만, 채굴산업에서 극동의 비중은 12.1~14.2%였다. 제재와 외국인투자자 이탈로 채굴산업에 급격한 생산감소가 발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2022년 고정자본투자에서 극동이 러시아 전체 평균(13.6%)보다 큰 증가율(26.5%)을 보여줬다. 극동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투자 증가가 관찰되지만, 특히 사하공화국(야쿠티야)과 아무르주에서의 투자 증가가 돋보인다. 두 지역의 투자 총액을 합하면 극동 전체 투자액의 43%에 달한다. 극동에서 고정자본투자는 △유용광물 채굴 △건설 △전력 가스 난방 공급 △운송 보관 등 4개 부문에 전체 투자의 약 60% 이상이 집중된다. 두 지역은 관련 산업의 대규모 플랜트 공사가 지속된 덕분에 투자를 선도하고 있다.

물론 일부 부정적인 측면도 발견된다. 한편으로 극동에서 주택건설 투자 비중은 줄이고, 비거주용 건물과 시설 투자 비중을 확대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동시에 기계 설비 투자 비중도 감소하고 있다. 2020년 32.5%에 달하던 기계 설비 투자 비중은 2022년 28.7%로 하락했다.

대외교역에 미치는 부정적인 여파는 예상만큼 크지 않았다. 연료에너지복합체 제품은 전체 극동 수출 중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인 위상을 갖는데, 제재조치로 수출 물량은 감소했지만 국제에너지 가격이 급등함에 따라 부정적 영향을 상쇄했다. 전쟁으로 유럽 서쪽에서의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극동을 통한 수입이 촉진됐다. 2022년 극동을 통한 병행수입 형태의 반입 규모는 47억달러를 초과했다.

교역국의 기형적인 다각화도 진행됐다. 2021년만 하더라도 중국(35.5%) 한국(26.4%) 일본(13.5%)이 극동의 주요 교역국이었다. 그러나 2022년 9개월간 교역만 놓고 보면 한일 양국의 비중은 급감하고, 중국이 73.5%로 압도적인 1위 자리에 올라섰다. 한편 극동 교역에서 비중이 고작 0.5% 미만에 불과했던 베트남 인도네시아가 각각 2.2%, 2.5%로 증가하는 변화도 나타났다. 러시아가 아세안 남방 국가들과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의지는 오래전부터 표출됐지만 제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위기와 발전가능성 혼재한 극동

극동의 높은 물가상승률과 주민들의 소득 감소로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있다. 2022년 극동의 물가상승률은 11.8%였고, 실질소득은 전년 대비 2.2% 감소했다. 러시아 여타 지역과의 소득격차도 좁히지 못했다. 2020년 개정된 극동개발전략은 극동 주민의 삶의 질을 러시아 평균 이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지만, 가속화의 동력은 떨어지고 있다. 2018~2019년만 하더라도 극동의 1인당 화폐소득은 러시아 평균보다 약 7% 높았지만, 2022년에는 초과액이 1.8% 수준으로 하락했다. 자바이칼주와 브랴티야 공화구, 유대인자치주의 경우 주민 소득이 러시아 평균의 68~74% 수준에 불과하다.

2022년 1월 1일 기준 러시아 인구(1억4555만명)는 코로나 팬데믹 전인 2019년과 비교해 약 2.8%가 감소했고, 같은 기간 극동에서는 1.2%가 감소한 809만명이었다. 같은 기간 극동에서 의미있는 인구 증가가 관찰된 지역은 사하공화국(2.6%증가)뿐이었다.

인구의 자연감소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2019년 극동 인구 1000명당 자연감소율은 1.1명이었는데, 2022년엔 5.0명으로 상승했다. 자연감소를 상쇄하려면 이주에 따른 인구 유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유입보다 유출이 더 많았다. 2021년에야 비로소 7445명의 이주 인구 증가가 관찰된다. 사하공화국과 캄차트카주, 하바롭스크주 등이 주요 증가 지역이다.

결론적으로 주택 보건의료 교육 등 정주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극동을 탈출하려는 흐름을 차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최근 극동의 몇몇 지역에서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진행되면서 외부에서 유입되는 노동력 증가가 관찰되고 있지만, 대다수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등 구소련공화국 출신이다. 러시아 내에서의 순유입이 아니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극동 인구는 2030년이면 770만~790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재 극동에는 위기와 발전가능성이 혼재돼 있다. 단 몇가지 사실은 명확해졌다. 첫째, 러시아는 전쟁과 제재가 장기화됨에 따라 급변한 지정학적 상황과 대내외 경제환경에 맞춰 극동 개발과 신동방정책을 새롭게 수립해야 할 과제에 직면했다. 둘째, 아태지역 통합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복무하는 하위 프로그램으로 전락하는 한 극동 개발 전략과 신동방정책의 미래는 없다. 주변국들과 혁신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협력을 강화할 때 극동의 미래가 열린다. 셋째, 극동의 정주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한 현재의 극동 개발이란 역외(중앙) 원자재 수출 대기업의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일 뿐, 극동을 위한 지속가능한 개발 전략이 아니다.

북방정책 성과 인태전략에 침식되는 중

올 8차 동방경제포럼에도 대한민국의 정부대표단 파견 계획은 없다. 얼마 전 재계를 대표하는 일부 경제단체장이 이런 때일수록 동방경제포럼을 활용해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소통을 강화할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민간기업들의 포럼 참여를 적극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대러 제재에 참여하며 북방 러시아를 손절한 모양새니 한미 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주저하는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지금 도처에는 북방정책의 성과가 인태전략의 깃발 아래 서서히 침식돼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상황에 따라 잠시 멈추거나 우회할 수는 있어도 한순간을 살자고 극동으로 연결된 북방협력의 다리를 우리 손으로 끊지는 말아야 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는 결코 영화 속의 절규가 아니다. 미래의 현실로 구현될 수도 있다.

성원용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