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아세안은 국제무대의 중심이 되었나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

국가 체제 이념 종교 상의 차이는 물론, 전쟁과 대립으로 상호불신이 극에 달했던 동남아인들이 불과 50여년 만에 '우리는 아세안, 우리는 하나'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렸으나 갈수록 속도를 높인 아세안정상회의처럼 동남아인들의 아세안정체성 또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오늘 오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제18차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개최됐다. 아세안 10개국을 비롯해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과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어제는 아세안이 한중일 동북아 3국 정상만을 초청한 제26차 아세안+3정상회의(APT)가 열렸고, 또 11개 대화상대국 중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와 개별적으로 벌인 아세안+1 회의가 숨가쁘게 뒤따랐다. 다른 대화상대국인 인도 호주 UN과 아세안의 회의는 오늘 EAS를 전후한 자투리 시간에 개최된다.

세계 20여국에서 온 정상들과 지도자들은 아세안이 주관하는 이 회의기간을 이용해 개별적인 정상회담을 시시각각 연다. 이제 아세안정상회의가 열리는 이 1주일은 일년 중 정상들 간의 만남이 가장 활발한 주간으로 자리잡았다.

이 화려한 '별들의 축제' 중심에는 아세안이 있다. 회의만 사흘간 지속되는 이 축제는 아세안 10개국이 참석하는 아세안정상회의가 첫날 개막테이프를 끊으면, 다음날부터 아세안이 호스트가 돼 한중일 정상을 초청하는 APT, 그 다음날 호주 뉴질랜드 인도 미국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EAS로 이어진다. 아세안정상회의는 이번으로 제43회를 맞았다. 1967년 아세안 창설 이후 첫 33년간 총 5회, 다음 10년간 매년 1회씩 총 10회, 최근 14년간 연 2회 총 28회가 열리는 J커브형 성장추세다. 아세안이 하나의 지역공동체로 통합돼 가는 속도를 감지할 수 있다. 동시에 아세안이 국제사회의 쟁점을 논의하는 중심무대를 제공하겠다는 '아세안 중심성' 담론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결과 통합 위한 동남아 노력 결실

그렇다면 유럽 북미 동아시아 중동 등 세계 강국 부국들이 모인 지역들을 제치고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세안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3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동남아 지역이 갖고 있는 문명사적 이념적 대표성, 둘째 역사적 지정학적 지경학적 중심, 마지막으로 아세안을 통한 지역통합이다.

첫 2가지 측면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동남아는 문명사적으로 세계 5대 문명이 유입돼 수용적이고 통합적인 동남아문화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근현대사 속에서는 서로 충돌하는 좌우 이데올로기로 분쟁과 전쟁이 일어났고, 여전히 그 흔적과 잔재가 남아 있는 곳이다. 인도 중국 중동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모든 세계종교가 공존하고, 베트남이나 라오스처럼 아직도 공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나라도 있다. 동남아는 외부인들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다양하고 포용적인 문화와 풍부한 역사적 경험을 자랑한다.

동남아는 근대 이후 줄곧 세계 열강들이나 패권국가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지역이었다. 향신료 무역이 활발하던 16세기 이래 동남아는 서구열강과 강대국들의 주된 각축장이었다. 대항해시대에는 동남아를 호령한 나라가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근현대에 들어서는 식민지쟁탈전 세계대전 냉전의 표적이 됐다. 21세기 동아시아 시대가 열리고 미중 간의 경쟁과 대립이 가속화되면서 동남아는 또 다시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부각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동남아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데는 이보다 더 적극적인 요인과 능동적인 주체가 있다. 바로 아세안을 통한 단결과 통합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못살고 힘없는 후진국이었고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지역분쟁과 대량살육의 내전까지 겪었다. 그러던 동남아가 불과 50년 만에 국제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데는 아세안을 창설해 역사적 이념적 갈등과 대립을 넘어 하나의 지역으로 통합하는 주체적인 노력을 벌여 왔기 때문이다.

아세안 회원국들, 즉 동남아 국가들은 독립을 유지한 태국을 빼면 모두 2차대전 후 신생국으로 출발했다. 이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더 오래 식민통치를 받았고, 도서부 지역은 길게는 300~400년 동안 서구 열강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남아 역사학자들이 '고전시대'와 '전근대기'로 부르는 식민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강성한 왕국 술탄국이나 부유하고 풍요로운 도시국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근대기의 긴 단절과 큰 변혁이 그 시대의 민족과 문화, 정치와 영토를 현대로 이어주지 못했다. 현대 동남아 국가들이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옛 국가들의 영광을 자기들 것인 양 포장하곤 하지만 그 간격과 차이가 너무 커 과거와 현재 간의 근원적 관계를 그대로 인정해 주기는 어렵다.

이질성 다양성 묶을 원칙 정립·유지

동남아 국가들의 현재 모습을 보면 상이한 나라들 간에는 물론이고 한 국가 내부에서도 이질성과 다양성이 크게 부각된다. 모든 나라들이 다민족사회로 구성돼 있으며 그중 인도네시아는 수백의 종족과 언어를 갖고 있다. 지금은 하나의 국가로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종족)들이 식민지 이전에도 같은 정치공동체에 속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이한 민족들을 하나의 울타리에 몰아넣은 것은 식민주의 국가였고, 이 식민국가 간의 경계는 현대 동남아의 국경들로 고착됐다. 동남아의 민족과 국가도 그 기원은 외생적인 식민주의다.

동남아 국가의 외생적 기원은 민족형성과 국가건설에 큰 장애가 됐다. 20세기 식민통치 말기부터 1970년대까지 동남아 국가들은 대내외적으로 격렬한 전쟁과 지역분쟁, 내전을 겪었다. 이런 곳이 불과 30여년 만에 지역협력과 통합의 꽃을 피운 것은 기적에 가깝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중일 동북아 3국이 협력과 통합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이고 역사논쟁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학자들은 유럽과 같이 상호 역사적 접촉이 풍부하고, 민주주의와 합리주의가 깊이 뿌리를 내린 '선진'지역에서나 지역통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아세안은 유럽연합(EU)과 매우 다른 역사적 환경과 맥락 속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동남아는 유럽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나름 식민통치와 학살, 2차세계대전, 특히 독립 후 이념적 지역분쟁과 내전을 겪었다. 무력갈등 또한 외생적이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대화와 주체적인 협력을 통해 전쟁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아세안 출범과 동시에 조약을 통해 △평화 △중립 △무력사용금지 △비핵 △내정불간섭을 원칙으로 못박아 이를 줄곧 유지했다.

EU는 민주주의를 채택한 모든 회원국들 간 대화와 타협을 통해 기틀을 마련해 갔다. 반면 민주국가가 몇 안되는 동남아는 내정불간섭, 민감한 의제 회피, 전원합의의 원칙 등을 고수하면서 회원국 간 상호신뢰부터 쌓았다. EU는 프랑스 독일 등 대국들이 통합을 주도해 나갔지만 동남아의 경우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대국은 오히려 뒤로 물러나 있었다. 말레이시아가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원합의제의 정신이 존중되고 지켜지면서 작은 나라들의 참여 동기를 높였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른바 'CLMV'(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를 고려한 단계적인 경제통합 전략도 주효했다.

아세안 지역 정체성 가속도가 붙을 것

아세안의 성공과 관련해 꼭 언급해야 할 것은 지역적 정체성의 형성이다. 과거 국가 체제 이념 언어 종교 상 차이는 물론 전쟁과 대립으로 상호불신이 극에 달했던 동남아인들이 불과 50여년 만에 놀랍게도 '우리는 아세안, 우리는 하나'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렸으나 갈수록 속도를 높인 아세안정상회의와 아세안의 경제통합처럼 동남아인들의 아세안정체성 또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와 K-대중문화로 동남아인들 앞에서 우쭐대는 우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7억 인구로 뭉친 아세안인들 앞에서 위축감과 왜소함을 느끼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된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