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미국 에너지부가 공개한 2023년 9월 현재 캘리포니아의 전기차 충전소는 1만5811개지만 다른 주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애리조나 1114개, 뉴멕시코 269개, 텍사스 2896개, 오클라호마 351개, 미주리 1177개, 일리노이 1228개다. 전기차를 끌고 캘리포니아 밖으로 로드트립을 떠나는 건 아직은 무모한 시도인 것 같다.

"평온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다(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ed sailor)"는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에 취해 무작정 길을 나섰다. 실리콘밸리 근무가 막바지를 향해 가면서 좁은 책상을 떠나 꼭 한번 올라서고 싶은 길이 있었다. 바로 66번 국도(Route 66)다. 1926년 완공돼 1985년 고속도로에서 해제된 이 길은 오랫동안 미국 역사 문화 정신의 아이콘 역할을 했다.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미국 동·서부를 잇는 2448마일, 약 3940㎞의 도로를 따라 많은 젊은이들이 캘리포니아로 왔다. 서쪽으로 길을 떠난 이에게 캘리포니아는 기회와 가능성의 땅 '골든 스테이트'였다. 묵시적일 뿐 아니라 명시적으로 그렇다. 1968년 개정된 캘리포니아주 법률(Statutes of California) 제66장은 '주의 공식 별칭이 골든 스테이트(The Golden State is the official state nickname)'라고 규정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살리나스 출신으로 스탠퍼드대학에서 공부한 작가 존 스타인벡은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66번 도로는 작은 지류들의 어머니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라고 묘사한다. 20세기 중반 길을 나선 미국인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쳤는가. 물론 팍팍한 현실이다. 스타인벡의 표현에 따르면 "흙먼지에서, 좁아지는 땅에서, 밀고 올라오는 사막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에서, 비옥한 땅을 훔쳐 간 홍수에서, 트랙터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 현실에서" 도망쳐 시골길을 달리고 달렸다.

서부로 가는 그들의 여정에서 1차 목표는 66번 도로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66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 캘리포니아가 나온다고 믿었다. 예나 지금이나 캘리포니아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정신적·물질적 플랫폼이다. 66번 도로가 상징하는 미국의 이상주의와 개척정신은 현재 실리콘밸리의 빅테크기업이 이어받았다. 세계 시가총액 1위 애플은 자사 제품이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된다(Designed in California)'고 내세운다.

실리콘밸리 만든 비트세대와 히피세대

3년 가까이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면서 틈날 때마다 했던 작업은 지금의 혁신 중심지를 만든 연원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미국에 왔으니 좋다고 하는 유명 관광지를 아웃렛 쇼핑하듯이 쓸어 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많은 주변인들이 이야기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필자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시공간은 한정돼 있으니 마음 가는 일에 열의를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본 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정신 등 실리콘밸리가 탄생한 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다. 한국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분은 문화적·정신적 배경이다. 실리콘밸리는 미래주의와 낙관주의에 기초해 개혁과 갱신을 거듭해왔다. 실리콘밸리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문화적·역사적 토양에는 1950~1960년대 비트세대와 1960~1970년대의 히피세대가 존재한다. 둘의 공통점은 지금 구성된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세다.

1968년 7월 인텔을 창업하며 초창기 실리콘밸리 반도체산업의 중흥을 이끈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비트세대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동시에 편집증적 관리자였던 윌리엄 쇼클리에 대한 반란으로 회사를 뛰쳐나와 인텔을 설립했다. 1976년 4월,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히피세대다. 2011년 사망할 때까지 영적인 구도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잡스는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교차점에 서서 늘 더 나은 세계를 갈망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잇는 일련의 흐름에는 비트세대와 히피세대가 있다. 또한 이들 세대의 여정을 상징하는 66번 도로가 분명 실재하고 있었다.

전기차를 렌터했던 용기, 또는 무모함

귀국할 날이 다가오면서 66번 도로로 가는 발걸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까지 비행기로 가서 자동차를 빌리기로 했다. 애리조나까지 10번 주간(interstate) 도로를 타고 가서 하룻밤 묵고 66번 도로를 타고 복귀하는 식으로 동선을 짰다.

인터넷으로 미리 결제하고 남가주대학(USC) 근처에 있는 허츠(Hertz) 렌터카 대리점으로 갔다. 직원은 2가지 선택지를 줬다. "지금 빌릴 수 있는 차는 포드 머스탱 아니면 쉐보레 볼트예요. 머스탱은 추가요금을 내야 하고요. 볼트는 알다시피 전기차인데 급속충전(Fast Charging)이 가능합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볼트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한다고 이런저런 얘기를 뱉었음에도 전기차 운전 한번 안해봤다는 사실이 찔렸기 때문이다.

수난이 시작됐다. 차를 받았을 때 충전된 배터리는 50% 남짓이었다. 가능한 주행거리는 134마일, 약 215㎞였다. 캘리포니아를 동서로 나눴을 때 딱 가운데에 걸치는 캐시드럴 시티(Cathedral City)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캐시드럴 시티의 전기차 충전소를 찾아서 목적지로 잡고 주행을 시작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갓 출고됐는지 완전한 새차였다. 전기차가 상징하는 커다란 계기판도 달고 있었다. 구글 픽셀6 전화기의 안드로이드 오토로 지도를 연결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여정을 시작했다. 첫번째 경유지 캐시드럴 시티까지는 2시간이 걸렸다. 충전소 브랜드인 이브이고(EVgo) 앱에 가입하고 충전기를 연결했다.

아뿔싸. 급속충전을 해도 80%까지 93분이 소요된다는 알림이 떴다. 게다가 1회 충전 제한 시간은 60분이었다. 1시간 동안 기다리면서 햄버거를 사먹고 커피를 마셨다. 차로 돌아와 손흥민의 해트트릭 장면을 보는데도 시간이 더디게 갔다. 겨우 60분을 채우고 다음 목적지를 찾았다.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경계인 블라이스(Blythe)까지는 113마일, 약 181㎞ 떨어져 있었다.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142마일이 떴으므로 이론상 블라이스까지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현실은 이론과 다른 법인지 운전하면 할수록 배터리가 빨리 닳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의 남은 거리와 자동차의 주행 가능거리를 실시간으로 비교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주황색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블라이스의 전기충전소까지 남은 거리는 5마일 안팎이었다.

별다른 종교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신을 소환했다. 신은 기도를 외면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속도가 올라가지 않자 비상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빠져서 서행에 돌입했다. 뒤따르던 가솔린 차들은 알아서 전기차를 추월했다. 얼마 못가서 배터리가 완전히 죽었다. 이를 직감하고 진출 차로로 빠져서 차를 세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충전소까지는 3.5마일, 약 5㎞가 남았다. 허츠 렌터카의 고객센터 담당자에게 위치를 설명했다. 우선 GPS 번호를 대라고 했다. 33.606163 - 114.658802. 그는 필자가 있는 곳을 금방 특정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친절하게 견인차가 오려면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캘리포니아 밖은 전기차 충전 쉽지 않아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잭 케루악의 대표작은 '길 위에서'(On the Road)다. 66번 국도를 타기도 전에 '길 위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우여곡절 끝에 새벽 2시 반 숙소에 도착해 66번 국도가 지나는 주의 전기충전소 통계부터 찾았다.

미국 에너지부가 공개한 2023년 9월 자료다. 캘리포니아의 전기차 충전소는 1만5811개지만 다른 주는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애리조나 1114개, 뉴멕시코 269개, 텍사스 2896개, 오클라호마 351개, 미주리 1177개, 일리노이 1228개다.

전기차를 끌고 캘리포니아 밖으로 로드트립을 떠난 필자는 얼마나 순진하고 무모했던가. 평온한 바다에 너무 오랜 시간 머물렀나 보다.

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