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기억하는 첫 여소야대는 1988년 13대 총선이다. 당시 여당 노태우의 민정당은 125석 41.8%로 과반수에 실패했다. 1987년 6월항쟁의 독재와 반독재 구도가 대선까지 이어졌지만 야당의 분열로 대선에서는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도 독재와 반독재, 민주와 반민주에 지역당색이 결합해 여소야대가 만들어졌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과정에 노동이슈는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6월항쟁이 열어놓은 공간에 노동이 터져나왔다. ‘7,8월 대투쟁’이라 불리는 폭발적 노동조합 설립과 노조 민주화 열기로 전국을 덮어버렸다.

1988년 총선에서는 노동이슈들이 민주화 요구와 함께 부상했고, 여소야대 국면에서 노동자의 요구가 담긴 노조법, 노동쟁의조정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지금의 지방자치를 가능케 한 지방자치법, 국정감사권이 부활하고 노태우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맞서 총리 해임 건의 등 국회 권한을 풀파워로 사용했다.

당시 5공 청문회는 시청률 80%대를 기록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었다. 국민에게 국회의 효능감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국회를 통과한 법들은 당시 국민적 숙원을 법으로 만들어냈고 야당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국회였다.

총선 이후 공간에 노동이슈 터져나올 것

총선이 끝났다. 국민이 윤석열정권 심판이라는 회초리를 무섭게 들었다. 이번 총선에 심판 이슈가 워낙 강하다 보니 노동 관련 이슈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 대부분의 총선과 대선에서는 노동 관련 이슈가 부각되고 논쟁이 촉발되었지만 이번 국민들의 분노 기대 열망에서 노동이슈는 비켜나 있었다. 3년은 너무 길다고 외쳤고 그 외침이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6월 항쟁 이후와 비교 할 수는 없겠지만 총선 결과로 만들어진 열린 공간으로 노동 이슈는 송곳처럼 파고들고 터져 나올 것이다. 1987년에도, 박근혜 탄핵 촛불혁명 시기에도 노동조합 조직률이 급격히 늘어났다. 노동자는 정세를 꼼꼼히 분석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낀다.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고 있다.

우선 하청노동자의 온전한 노동3권을 위해 사용자와 노동자의 개념을 확대해 하청노동자의 합법 쟁의를 가능케 해야 한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이다. 기다릴 필요 없이 당장 노란봉투법을 재의결하고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서야 한다.

노란봉투법 말고도 급히 논의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산업전환의 시기 고용의 문제, 비정형 노동의 확대로 근로기준법 노동자 개념의 확대와 5인 미만 사업장의 전면 적용,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정년연장 등도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너무도 시급한 과제다. 노사정 각 주체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치열하지만 절박함으로 사회적대화를 해야 할 의제들이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회 입법 형식으로 노동의제 관철해야

총선 후 여당의 반성 메시지와 태도는 국민 마음을 얻지 못한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더 공격적으로 국회에서 입법이라는 형식으로 노동의 요구와 의제들을 관철해 가는 것이 시급히 요구된다.

노동이 목소리를 높이고,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 15명이 선두에서 활약할 것을 요구하고 협업해야 한다.

김준영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