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으로 불려왔던 정당들이 이번 총선에서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원내 6석을 기반으로 도약을 꿈꾸었던 녹색정의당은 원외정당으로 퇴출(?)당했다,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정의 실현을 위해 앞장서 왔음에도 민심으로부터 거부당한 꼴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많은 사람이 당혹감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때로는 직접 몸을 담그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해왔던 입장에서 한층 냉정하게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국민이 진보정당에 기대하는 핵심 지점은 세상을 바꾸어 사회구성원의 삶을 한껏 고양시키는 데 있다. 고전적 표현을 빌리자면 ‘변혁적 전망’을 담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처참한 실패를 겪어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97체제’라 부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지배체제가 수립되었다. 핵심은 돈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철저히 비용으로 간주하며, 무한경쟁을 기반으로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사상문화의 지배에 있었다. 거의 모든 기업은 신자유주의 사상문화를 철저히 내면화하고 실행에 옮겼다. 시종일관 사람을 비용으로 간주하면서 이를 줄이기 위해 골몰했다. 사회적 양극화는 그로부터 파생한 사회구조적 현상이었다.

97체제 극복은 신자유주의 사상문화 혁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민초가 신자유주의 사상문화라는 숙명을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하고 재촉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보정당들은 변혁의 핵심지점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2차산업혁명 시대에 갇힌 진보정당 주체들

4차산업혁명 시대가 열리면서 창조력을 체화한 사람이 새로운 시장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부상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 사람은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다. 신자유주의 사상문화 혁신은 4차산업혁명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문제는 진보정당 주체들의 사고가 2차산업혁명 시대에 갇혀 있었다는 데 있었다. 신자유주의 사상문화 혁신을 주도할 안목과 능력을 갖추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97체제 극복을 주도할 수 없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는 진보정당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노동 중심 가치마저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진보정당들은 기업 경영을 무시하고 노동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데 치중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 노동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벤처기업에서는 절대 통할 수 없는 관점이었다.

진보정당의 방식이 통할 수 있는 곳은 민주노총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대기업과 공공부문뿐이었다. 결국 진보정당들은 민주노총 울타리에 갇히고 말았다. 문제는 민주노총의 주역인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들이 현상유지에 집착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데 있었다. 오늘날 민주노총은 사회정치적 위상이 크게 추락해 있다. 노동자들마저 민주노총과 밀착해 있다는 이유로 진보정당을 기피했다.

현장과 유리된 조건에서 정의당을 중심으로 진보정당들이 미래비전으로 제시한 모델은 복지국가였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구시대 유물로 전락한지 오래된 실현가능성 없는 모델이었다. 세계화와 함께 기업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복지국가의 기초가 무너졌다. 국가는 기업과 부자들의 탈주를 막고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법인세와 고소득자 대상 조세를 낮췄다. 박지우의 ‘행복한 나라의 불행한 사람들’이 생생하게 묘사하듯이 복지천국으로 불렸던 스웨덴은 조세 정의가 한국보다 못한 나라가 되었다.

국민이 원하는 진보정당인지 돌아봐야

2011년 400여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기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연석회의는 2012년 대선 이후 개점휴업 상태로 연명하다 끝내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결정적 요인은 민심의 호응과 동참이 미약한 데 있었다.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데?’라는 민심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결과였다.

진보정당들은 국민이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며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답을 찾을 수 없다. 거꾸로 자신들이 국민이 원하는 진정한 진보정당으로서 요건을 갖추었는지 냉정하게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변함없이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