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시설이 없는 위험한 도로에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 숨졌다면, 비록 무면허 상태였더라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합의13부(박정대 부장판사)는 숨진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2021년 새벽 시간대 회사차량을 몰고 경기 화성시 공사 현장에서 나오는 흙을 운반하기 위해 미개통된 도로를 운전하던 중 핸들을 잘못 조작하는 바람에 배수지로 추락해 숨졌다. 그는 1종 대형 운전면허가 있었으나 음주운전으로 취소된 상태였다.

유족은 2022년 4월 공단에 유족급여를 청구했으나 공단은 “망인은 사고 당시 무면허 상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도로교통법 등을 위반한 중대과실로 사고가 발생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근로자의 범죄 행위가 원인이 돼 발생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족이 불복해 낸 소송에서 “이 사건 사고는 망인의 범죄행위가 사망 등의 직접 원인이 되는 경우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업무에 내재하거나 통상 수반하는 위험의 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1991년부터 운전한 점을 근거로 “면허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망인은 이 사건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능력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며 “무면허운전이 사고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이어 “사고가 A씨의 본래 업무인 공사 현장 사토 반출을 위해 하차지를 점검하러 가는 도중 발생했다”며 “고용주가 제공한 차량을 운전해 하차지로 이동하는 것도 통상의 업무수행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씨의 전방주시 의무 태만이 원인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도로에 가로등이 설치되지 않았고 노면이 젖어 미끄러웠던 데다 커브 길에 안전 시설물이 없었던 점 등을 보면 A씨의 과실만으로 사고가 났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이 사건 사고는 근로자가 안전에 관한 주의의무를 조금이라도 게을리했을 경우 도로 여건이나 교통상황 등 주변 여건과 결합해 언제든지 현실화할 수 있는, 업무 자체에 내재한 전형적인 위험이 현실화한 것”이라고 밝혔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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