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헌법소원 기각 … 무상지급 아닌 대출

“피해지원사업 지속가능성 위해 불가피”

교통사고로 다친 부모에게 정부가 자녀 양육비를 무상 지급하지 않고 대출해준 뒤 30세 이후 자녀들이 직접 갚도록 하는 법 규정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한정된 자원으로 많은 유자녀에 피해지원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헌법재판소(소장 이종석)는 옛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시행령 일부 조항에 대한 강 모씨 형제의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5대 4 의견으로 청구를 기각했다고 30일 밝혔다.

강씨의 아버지는 이혼 후 자녀를 혼자 양육하던 중 1996년 7월 자동차 사고를 당해 중증후유장애를 앓게 됐다.

그는 2000년 3월 강씨 형제의 법정대리인 자격으로 ‘유자녀 생활자금 대출’의 지원대상자로 선정됐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은 각각 대출금 1975만원과 2475만원을 자녀 명의 계좌로 지급했다. 당시 청구인들은 각각 만 9세, 8세로 미성년자였다. 이후 청구인들의 아버지는 2008년 사망했다.

자동차손배법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거나 후유장애를 입은 사람의 미성년 자녀(유자녀)에게 학업 유지를 위한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생활자금을 무이자로 대출해준다.

이렇게 빌린 생활자금은 유자녀가 30세가 됐을 때부터 나눠서 갚아야 한다.

강씨 형제는 자신들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30세가 된 뒤 공단으로부터 통보받아 알게 됐다.

이들은 “대출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위해 대출금이 사용된 적이 없다”며 2021년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헌재에 헌법소원 심판도 청구했다.

강씨 형제는 자동차손배법이 중증 후유장애인 당사자와 65세 이상 고령의 피부양가족에게는 보조금을 주면서 유자녀의 생활비는 상환이 필요한 대출로 주는 것이 평등 원칙에 어긋날뿐더러 아동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유자녀에게 대출금 상한 의무를 지울 수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다수 재판관(이종석·이영진·문형배·김형두·정형식)은 “심판 대상 조항이 대출의 형태로 유자녀 양육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은 유자녀가 소득 활동을 할 수 있는 30세 이후에는 자금을 회수해 한정된 재원을 가급적 많은 유자녀를 위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씨 형제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단이 지원 사업을 지속하려면 재원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 유자녀에게는 무이자로 대출해줌으로써 향후 지원금을 회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상환 능력이 없는 중증 후유장애인 본인과 피부양가족에게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합리적 이유가 있는 차별이라고 봤다.

반면 이은애·김기영·이미선·정정미 재판관은 반대 의견을 냈다. 이들은 “유자녀를 채무자로 한 대출로 지원하도록 한 심판대상조항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며 “유자녀의 아동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반대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국가가 생계가 어려운 아동의 불확실한 미래 소득을 담보로 대출사업을 하는 셈”이라며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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