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해외 주요 언론을 읽다보면 대한민국의 높아진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경제와 산업은 물론 문화·예술 분야에서까지 높은 성취를 거둔 한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탐색하는 기사가 부쩍 늘었다. 4월에만도 ‘K-컬처(한국 문화예술)’의 위용을 다룬 기사가 여럿 등장했다. 영국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즈(FT)의 ‘K팝은 절정에 이르렀는가? 골드만삭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4월 5일자)와 세계 최고 권위의 주간지 디 이코노미스트가 쓴 ‘한국의 팝문화가 세계를 뒤흔드는데 왜 북한은 그렇게 못 하는가’(4월 22일자)가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기사만 나오는 건 아니다. FT는 ‘한국의 경제기적은 끝났는가?’(4월 23일자)라는 제하의 심층분석 기사를 큼직하게 다뤘다. ‘제조업에 의존해 고도성장 해온 대한민국이 기존 방식에 한계를 맞았으며,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한국의 간판브랜드 ‘K-’ 접두어 지속가능할까

이들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계인들에게 유행 접두사가 된 ‘K-’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해외 전문가들이 ‘K-팝’ ‘K-드라마’ 등 한국인들의 역동적이고 개성 뚜렷한 문화장르를 ‘K(한국)’라는 접두사에 담아내 주목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댄스뮤직과 드라마, 영화 등에서 최고수준의 히트작을 쏟아내면서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미주대륙 등 전세계에서 돌풍을 일으킨 ‘K-컬처’는 한국인들의 자긍심을 크게 높여주고 있다. ‘K-’가 이렇듯 밝고 신명나는 대한민국의 간판 브랜드로 떠오른 것은 우리들의 선배세대가 감당해낸 헌신과 희생 덕분이다. 급속한 경제·사회적 발전을 거뒀기 때문에 문화예술 육성에 눈을 돌릴 여유를 갖게 됐다. 한국 사회가 고도성장을 일궈낸 데는 “우리는 비록 어렵게 살더라도 자식들에게만은 반드시 좋은 세상을 열어주겠다”며 고된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은 부모(조부모)세대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고생이 부모로만 끝난 것도 아니다. 여러 아이들을 낳은 가정에서 부모들의 힘만으로 벅찰 때는 장남과 장녀에게도 동생들 뒷바라지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대한민국이 절대빈곤을 딛고 도약하던 시절, 하고 싶은 공부를 꾹 참고 일찍 돈벌이에 나서 어린 동생들 학비를 보태야 했던 ‘K-장남’과 ‘K-장녀’들이 적지 않았다. 꿈 많은 소년 소녀들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등 전국 각지의 공장지역에 생산직 노동자로 취직하거나 이역만리 서독의 광부와 간호사 등으로 파견돼 힘들게 번 돈을 고향 집에 부쳤고, 부모들은 그 돈으로 동생들을 키웠다.

‘세대 이기주의 포퓰리즘’ 더 이상은 안돼

그런 나라에서 요즘 미래세대를 곤경으로 몰아넣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씀씀이를 위해 나라 곳곳의 재정을 거덜내는가 하면, 재원고갈 비상이 걸린 연금제도는 미래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떠넘기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미래세대의 고통에 눈감은 ‘세대 이기주의적 포퓰리즘’에는 보수와 진보 정당 간 차이도 별로 없다. 선거를 치를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무분별한 개발사업과 복지프로그램을 쏟아낸다. 그 결과 지난해 나랏빚이 사상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5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40년이면 나랏빚이 연간 GDP 규모를 추월하는 데 이어 2070년에는 GDP의 2배 가까운 7137조6000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국회 예산정책처)까지 나왔는데도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지난달 총선에서 각 당이 내놓은 지역구 공약 이행에만 최소 554조원(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추정)이 필요한데, 최근에는 미래세대에 2000조원 이상의 부담을 떠넘기는 국민연금 개편방안을 ‘개혁안’이라는 이름으로 내놨다. 선배세대의 희생 덕분에 풍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아랑곳하지 않는 세대 이기주의에 푹 빠져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래선 안된다.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