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맹도 후순위로 밀리는 글로벌 정글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전세계는 미래 핵심 전략물자를 자국에서 생산하겠다는 목표 아래 자유무역주의를 팽개치고 기업 투자 유치에 사활을 거는 등 총성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과 프랑스 등은 규제를 풀고 세제 및 인프라를 지원하면서 대통령과 장관이 앞장서서 투자 유치전에 나섰다. 일본도 반도체기업 지원용 자금 6조원을 조성해 총리 직속 투자유치 기관에 맡겼으며 아일랜드는 브렉시트로 영국을 떠나는 글로벌 금융사 유치에 발 빠르게 나서면서 135개 글로벌 금융기관의 유럽 본부를 유치했다.
동맹과 국익 별개로 취급하는 냉혹한 현실
특히 미국은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에 이어 바이오까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자국 우선주의를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맞서기 위한 새 공급망 구축을 전면에 내걸고 자국 기업의 본국 회귀와 동맹국 기업의 대미 투자를 유도해왔다. 이에 따라 한국도 미국의 공급망 재편 전략에 보조를 맞추며 미국과의 경제안보 동맹 강화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북미에서 최종 조립해야 전기차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미국 자금을 지원받아 공장을 짓는 반도체기업은 10년간 중국에서 첨단공정 시설을 지을 수 없다'는 등 미국입장만을 전적으로 반영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바이오산업 행정명령'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미국의 이익 앞에 예외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空洞化)와 일자리 소멸 등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올해 880조원 규모의 미국 투자를 발표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4대 그룹을 비롯한 한국기업들은 미국의 이같은 일방적인 한국산 제품 차별화로 인해 맨붕 상태에 빠졌다.
문제는 새 공급망 구축에 따른 열매가 고스란히 미국에 귀결되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산 전기차 등에 대한 미국의 차별은 상대국을 불리하게 대우하지 말라는 한미 FTA '내국인 대우' 조항에 어긋나는 것으로, 명백한 조항 위반이라 하겠다.
수혜는커녕 오히려 피해까지 입히고 있다. 세계 3위 반도체 웨이퍼 생산업체인 대만의 글로벌웨이퍼스는 독일 기업을 인수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고 대안으로 공장 건설을 선택, 한국에서 신규 공장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미 상무장관은 한국에서의 공장 건설 비용이 미국의 1/3에 불과해 한국에서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있다는 글로벌웨이퍼스의 소식이 전해지자 "거기에 맞춰 비용을 덜어주겠다"고 약속, 7조원 규모의 투자를 미국으로 돌리게 했다. 글로벌웨이퍼스는 미국 신공장에서 최대 1500명을 고용하고 매달 120만개의 웨이퍼를 생산할 예정이다.
미국의 IRA법 시행으로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7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미 무역대표부(USTR)의 캐서린 타이 대표를 만났다. 그러나 차별 문제를 풀기 위한 양자간 협의 채널을 가동하기로 합의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한국측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당장 IRA법에 손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IRA법은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시절 대선 구호로 내건 "미국을 더 나은 미국으로 만들자"라는 이른바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을 입법화한 것으로, 11월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행정부의 지지도를 끌어올린 한 수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견제를 내건 미국의 경쟁력 강화 법률들은 갈수록 보호주의 색채를 짙게 띠어가고 있다. 그 결과 이 법률들은 동맹과 국익이 별개로 취급될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장기간 위기 버텨낼 특단의 대책 마련을
한편 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22일 단행한 기준금리 인상에 이어 연말까지 계속 추가 인상, 연말에는 4.5%까지 금리를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연준의 금리인상은 우리나라의 기준금리 인상은 물론이고 원·달러 환율상승을 촉진, 물가불안을 더욱 조장하고 경기를 부진에서 침체로 몰고 갈 것으로 우려된다.
이젠 우리도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직시, 전략물자를 최대한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하는 등 장기간 위기를 버텨낼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겠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