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국 보스턴의 5월 말~6월 초는 연중 가장 북적인다. 하버드대와 MIT 졸업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호텔숙박비도 평소보다 3배쯤 비싸다. 그나마 1년 전 예약하지 않으면 구할 수도 없다. 졸업식 주인공은 학생들이겠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스피커(초청 연사)'에 쏠린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졸업식 연사는 2005년 6월 12일 스탠포드대에 초청된 스티브 잡스 아닐까.

그가 말한 "갈망하라,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는 고전이 됐다. 전후 맥락을 살피면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배워 성취하라"는 번역이 적절하겠지만. 여하튼 "사랑하는 일을 찾아 매진하라"는 조언은 췌장암 수술 이후 한 연설이어서 큰 울림을 줬다. 2021년 5월 13일 미국 CNN이 '역대 가장 위대한 졸업 축사'의 하나로도 선정했다.

그런 만큼 대학도 초청 연사 선정에 고심한다. 연사가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 자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자연스럽게 대통령과 기업가와 톱스타 연예인이 섭외 1순위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단골 초청 연사이다. 2009년 애리조나주립대, 2010년 미시간대, 2013년 모어하우스대, 2016년 하워드대에서 연설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모교인 프린스턴대(2010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캘리포니아공대(2012년), 페이스북(현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이 중퇴한 하버드대(2017년)에 초청됐다.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2013년 남가주대, 영화 '블랙팬서'의 주인공 채드윅 보우즈먼도 2018년 하워드대, 가수 겸 배우 테일러 스위프트는 33세의 나이로 지난해 뉴욕대 졸업식장에 섰다.

당대의 시대적 고민 담긴 졸업식 축사

이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때론 가볍고 유쾌하며 때론 무겁고 진중하다. 영화배우 로버드 드 니로는 2015년 뉴욕대 졸업식장에서 "너희는 마침내 해냈다. 그리고 X됐다"고 직설적으로 말해 화제가 됐다. 입에 발린 찬사 대신 "새로운 문이 열렸지만, 평생 거절당할 수 있는 문이다. 피할 수도 없다"고 말해 진실을 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2년 나이아가라대학 졸업식에서 테레사 수녀는 낙태에 반대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당시 낙태를 둘러싼 논쟁을 고려한 종교적 접근이겠다. 오바마가 거듭 변화를 위한 담대한 선택을 말한 바탕에도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인권문제가 깔려 있다. 이처럼 졸업식 축사에는 당대의 시대적 고민이 담겨 있다.

지난달 25일 하버드대 초청 연사는 영화배우 톰 행크스였다. 그는 "윌슨의 절친이자 라이언의 구원자이며 미국의 아빠"로 소개됐다. 윌슨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표착한 주인공이 배구공에 붙인 이름이다. 예술박사 학위와 하버드대 로고가 새겨진 배구공을 선물받았다. 그는 진실(Truth)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식인의 무관심을 경고했다. "무관심은 진실을 죽이고 평등을 위협한다"고 했다. "거짓과 무지와 편협보다 더 나쁘다"는 거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 그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을 우려한 메시지이다.

1일 MIT의 졸업식에는 NASA엔지니어에서 유튜버 사업가로 변신한 마크 로버가 초청됐다. 그는 '우주에서 달걀을 떨어뜨리면' '젤오(Jell-O)에서 수영할 수 있나' 등 교육적인 과학 콘텐츠 제작자로 유명하다. 구독자 2390만명에 총 33억900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그는 인공지능(ChatGPT)을 이용해 축사를 작성했다며 낙관주의와 협동을 미래 성공전략으로 내세웠다. 최근 기후변화와 싸우는 플랫폼을 구축, 2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3000만 파운드의 해양 플라스틱을 청소하는 것이 목표인데 연대와 협력이 열쇠라고 했다. AI로 구동되는 초연결시대에 문제해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더 뜨거운 호응받은 토착민 성 소수자

사실 더 뜨거운 호응을 받은 사람은 전혀 유명하지 않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생 빅 호그였다. 톰 행크스에 앞서 '다음 한 걸음(Next Step)'을 주제로 연설했다. 자신을 "토착민 성소수자이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시민"으로 소개했다. 미국식으로 설명하면 그(he)도 그녀(she)도 아닌 그들(they)로서 성별도 여성(F)이나 남성(M)이 아닌 기타(Other)다. '그들'은 "토착민(인디언)의 땅을 되찾고, 퀴어와 트랜스젠더를 위해 싸우는 사명을 띠고 하버드대에 왔다"고 말했다.

작년 말 묻지마 총격에 반신불수가 된 '그들'은 달팽이 속도로 다시 걸음마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혼자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한번에 한걸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고 외쳤다.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버드대와 MIT 졸업식 연설의 화두는 진실과 정의, AI와 기후문제, 사회적 소수자였다. 시대적 고민이야 우리라고 다르겠나. 대응 방식이 독점과 배제이냐, 공유와 연대이냐 차이일 뿐이겠다.

박종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