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보다 사업장별 자율결정 우선 …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시간 규정 조속히 적용해야”
근로시간은 노사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근로자에게 근로시간은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토대이자 임금과 직결된다. 사용자에겐 근로시간은 기업 비용의 상당 부분을 차치하는 비용이자 기업의 생산성 및 효율성 제고를 위한 기본적 수단이다.
우리나라는 사업장 내 장시간 체류로 인한 건강권 침해, 근로시간 대비 낮은 생산성 및 업무 효율성, 근로시간에 대한 보상을 둘러싼 노사분쟁 등 근로시간과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의 의견을 반영해 ‘후다닥’ 처리하거나 ‘은밀하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와 기술발전 등으로 일하는 방식 미래에 대응한 다양하고 유연한 근로시간 개편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근로시간의 유연화에 대해 한쪽에서는 일시적인 장시간 노동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다른쪽에서는 일하는 방식의 다양화(재택근무 시차출근 등)로 이해하고 있어 서로 상충되고 있다.
김기선 충남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근로시간과 관련한 각 제도는 서로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으므로 각 제도에 관한 단편적인 개선 방안이 아닌 근로시간제도 전체적인 차원에서 검토돼야 한다”면서 “근로시간제도의 보편적 적용, 건강권 보호 및 노사의 자율성 확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근로시간제도에 대한 ‘패키지딜’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장시간 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획일적인 법정 근로시간 단축보다는 근로자 건강권과 시간주권을 보장한 가운데 다양하고 유연한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원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은 23일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인구구조 대전환, 일하는 방식의 미래에 대응한 근로시간 제도 개선’ 토론회를 열었다.
이정민 서울대 경영학부교수는 첫 발제에서 인구변화 대응의 성공 여부는 자원배분의 효율성과 노동생산성에 달려 있기 때문에 노동력의 양적·질적 확장을 위해서 근로시간제도의 개편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경제활동인구는 2022년 2900만명에서 2072년 1600만명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노동력 구성이 전면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 노동시장은 장년층(55~64세)과 여성의 유휴노동력이 존재해 노동생산성은 낮으나 그만큼 개선의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최근 기술발전을 주도하는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혁신은 일하는 방식을 플랫폼 노동, 재택근무, 원격근무 등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며 “노동력의 규모와 구성이 변하면 일하는 방식이 변하게 되며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게 곧 노동생산성의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사업장별 근로시간 제도 자율화를 통한 근로시간 단축을 제시했다. 그는 “임금, 근로환경, 근로자 구성, 재무상태가 사업장마다 다른데 근로시간만 통일되게 규제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근로계약 준수, 건강권 보호, 근로자 시간결정권 보장과 같은 원칙은 견지하되 실제 운영은 사업장 수준에서 자율화하고 객관적인 보상체계를 확립해 임금투명성도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 근로시간 제도 제약될 수 있어” = 엄상민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도 “현행 근로시간 제도는 다양한 형태의 근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제약이 될 수 있다”면서 “근로시간은 업종별로 평균적인 길이뿐 아니라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정도도 크게 달라 장시간 근로여부와 변동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엄 교수는 근로시간 개편이 근로자 건강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나 원치 않는 근로시간 증가 등 근로시간 유연화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 대해 “근로자 건강권 보호와 실질적인 근로자 자율성 확보를 위한 방안을 병행하면서 평균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며 “근로시간 제도는 가능 불가능의 양자택일보다 일하는 방식에 따라 근로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말했다.
성재민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은 ‘국제비교로 본 우리나라 근로시간 실태와 향후 정책과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성 부원장은 “우리나라 주당 근로시간이 다른 선진산업국가들에 비해 긴 핵심원인은 장시간 근로가 아니라 단시간 일하는 근로자가 적은 노동시장 구조 때문”이라며 “시간제 근로자가 적고 전일제 근로자의 단축 유연근무 활용도가 현저히 낮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유럽의 주당 근로시간 차이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연근로의 경우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 개선, 자녀 수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는데, 6세 이하 자녀를 둔 여성 근로자의 유연근로 활용도는 유럽연합(EU) 15개국은 83.6%인데 우리나라는 25.0%로 큰 차이가 있다”며 “근로자 건강보호를 전제로 근로자의 시간주권과 기업의 수요에 부응하는 유연성이 조화되는 형태의 근로시간 제도 변화와 타협이 추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성 부원장는 “여름철에 연차휴가 등에 따른 일시휴직 비중이 EU 27개국은 30%에 근접하는데 우리나라는 3%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것이 연간 근로시간 격차로 이어졌다”며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 도입 등 ‘쉼 관행’ 개선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 부위원장은 “정책 방향은 법정 근로시간의 추가적인 단축보다는 상황에 맞는 유연한 근로시간제 도입과 운영이 우선적 목표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로시간 노사자율에만 맡겨서는 안돼” = 이어진 토론에서 김기선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시간은 사업장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가장 기본적인 근로조건”이라며 “주요 해외 입법례를 보더라도 사업 규모에 따라 법정 근로시간 제도 및 근로시간 상한 적용을 달리하는 입법례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근로자의 보호 필요성 측면에서 상시 4명 이하 사업에 대해 조속한 시일 내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5명 미만 사업장은 연장·야간·휴일근무수당, 연차 유급휴가, 공휴일 유급휴가 등의 조항에서 적용이 제외된다.
김 교수는 “기본적인 건강권이 보장되려면 과도한 근로가 이뤄지지 않게 근로시간 법제에서 틀을 갖춰야 한다”며 “주당·1일 근로시간 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주당 48시간이 넘지 않고 근무일간 최소 11시간 휴식을 보장하는 것이 국제기준”이라며 “주 단위 평균 근로시간이 일정 수준(한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노사가 본인의 사업장에 맞는 근로시간 제도를 채택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기업별 교섭이 지배적인 한국사회에서 근로시간을 노사자율에만 맡겨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노조 교섭력이 큰 대기업과 공공부문과 그렇지 않은 무노조·소규모 사업장 간 노동시간의 격차가 확대돼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악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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