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일 농정연구센터 이사장 / 서울대 명예교수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세계농업질서가 획기적으로 개편된 지 24년째다. 정부가 2005년 관세화 방식으로 쌀시장을 개방한 지도 14년 이 지났다.

농산물 시장의 전면 개방을 의무화한 'WTO 농업협정' 기준에 맞추기 위해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모든 회원국은 19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농정틀을 개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농정은 현실과 동떨어져 왜곡된 '농본주의'와 농업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 '농업(투자)무용론'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 주장에 갇혀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와 혁신의 흐름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농업·농촌은 밝은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농본주의'

농본주의는 농업·농민·농촌사회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국가존립의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업·농촌의 쇠퇴가 진전되면 농본주의는 미래지향적 성격으로 진화하기보다 수세적 퇴행적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왜곡된 농본주의는 쌀편향 농업정책과 국민먹거리 및 농촌의 중요성을 외면한 파행적 농정체계로 나타나고 있다.

농업·농촌의 최근 변화를 보자. 1975년 총인구 중 농촌인구는 50.8%였지만 2000년 20.0%로 크게 줄었다. 하지만 이후 안정세를 보여 2015년에도 18.6% 수준이다.

반면, 농촌인구 중 농가인구 비중은 1975년 73.9%에서 2000년 43.0%, 2015년 27.4%로 계속 급격히 줄고 있다. 개발연대에는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농가인구였지만 최근에는 10가구 중 3가구 미만이다.

농가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47.2%에서 2014년 29.5%로 크게 줄어 위축된 농업의 위상을 드러낸다. 쌀소득이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4.6%에서 10.6%로 절반 이상 떨어졌다. 쌀정책을 통해 농가소득을 올린다는 목표는 허구에 가까운 상황이다.

국민은 농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매년 실시하는 '농업·농촌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2016년)'에 따르면 도시민이 기대하는 농업·농촌에 대한 기대는 △식량의 안정공급(16.5%) △국토 균형발전(14.8%) △자연환경 보전(21.7%) △전통문화 계승(14.8%) △관광·휴식장소(14.9%) △전원생활 공간(14.7%) 등이다.

식량의 안정공급은 2006년 36.1%였지만 10년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농촌생활이나 농촌공간과 관련된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 쌀정책에 편중된 농본주의 농정을 타파하는 게 시대적 요구로 제기되고 있다.

농업·농촌의 가치 모르는 '농업무용론'

우리 농정의 혁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현대 세계의 농정추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농업(투자)무용론이다. 한국농업은 국제경쟁력을 갖기 어려우니까 제조업 중심의 비교우위산업에 특화하고, 필요한 농산물은 수입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인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세계 농정은 WTO농업협정체계에서도 농업의 비교역적 관심(NTC), 다원적 기능, 공공재 개념을 중심으로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오늘날 선진제국은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유지·증진하기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우리도 최근 헌법에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 증진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농본주의와 농업무용론이라는 두 개의 큰 벽을 넘어 국제사회의 흐름에 부합하고 국민의 농업·농촌에 대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농정혁신을 기대한다.

정영일 농정연구센터 이사장 / 서울대 명예교수